무신론자도 천국간다고?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을 앞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진 내용으로 기독교계에 큰 파문을 던진 발언이다.
이탈리아 일간 ‘라 레푸불리카’에 실린 교황 기고문의 핵심은 이렇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선을 행한다면 천국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살면 됩니다.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신론자에게는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 죄가 됩니다.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지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늘 판단하게 합니다. 남을 개종시키려 드는 것은 실로 허황한 짓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서로를 알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의 반경을 넓히는 것. 우리에게는 바로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교황의 의견이긴 하지만 이는 성서적 진리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갈 2:16)라는 말씀과는 배치된다.
평생을 하나님의 일을 해 온 사람들과 달리 늦깎이로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권위나 자리가 주는 무게감에 압도되기 쉽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집중적인 탐구방식에서 시작했다. 내가 경배하는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어떤 분이시기에 내가 경배해야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경배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가. 이런 과제들을 정확히 정리하지 않은 채 무작정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한 성서적 진리에 대한 고민 없이 그냥 누군가의 말을 무작정 믿고 따르는 일에 대해 다소의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예수님을 알기 위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면서 갖게 되는 단상은 교황의 의견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좋은 것이 좋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모나게 살기보다는 무난하게 사는 편이 낫기도 하다. 무난한 사람들이 대체로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곧바로 타인의 주장이나 의견에 토를 달지 않는 일 등에 대해서 관대함으로 대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믿음과 관련해 우리는 때로는 추상과 같은 엄격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지적인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오로지 판단의 근거와 기준 그리고 잣대는 인간의 지력이나 세상적인 필요가 아니라고 본다. 처세와 관련된다면 당연히 타인을 관대하게 대하고 두루 두루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성경적 진리까지 타협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야 하고 삼을 수도 없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나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도 의심을 해 봐야 한다. 우리 각자가 믿음의 주체를 다른 분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여기도 하나님이 계시고 저기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범신론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래에 예수님을 믿는 분들 중에도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나 내가 믿는 하나님이 뭐가 다른 가’라고 반문하는 분들도 제법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탐구와 숙고 그리고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분일 뿐만 아니라 이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도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주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교회사를 읽다보면 상황과 필요에 따라 성서적 진리에 대한 변질이 많이 이루어져 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일들은 과거에만 아니라 오늘날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상황, 필요, 인간적 판단이나 욕심 등이 버무려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허무는 일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믿음의 변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변형들이 처음에는 선의로 행해지게 되지만 시간이 가면서 치유할 수 없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를 판단하고자 한다면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를 참조하면 된다.
세상에는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성서적 진리에 다가서면 설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은 그 어떤 선의에서 나온 시도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권위나 자리에 맹종하지 않고 스스로 성서적 진리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일은 평신도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열렬히 좋아하는 주장이나 의견조차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국민일보 201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