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1

2020. 7. 18. 02:10하늘나라가는 비밀문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데, 우리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었는가?
출처: 조선일보 2012.10.2....김용규 철학자·‘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저자
죄를 짓도록 내버려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주고, 죄와 악을 참고 기다리며, 자기를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구원하려 한 것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사진>이 1987년 사망 전,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난해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고 이 회장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시도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다시 자신 인문학으로 풀어낸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용어가 있다. 근래에는 ‘인종 청소’라는 말로도 자주 표현되는 제노사이드는 상대가 잘못을 했든 안 했든 간에 단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살해하는 집단학살을 뜻한다. 혁명기 스탈린 러시아에서는 2000만명, 2차 대전 중 히틀러 나치 점령지에서는 100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제노사이드했다. 어디 그뿐인가? 제레드 다이아몬드 ‘제3 침팬지’에 의하면, 20세기 안에 행해진 집단학살 가운데 100만명이 넘는 규모만도 10건에 가깝다. 1915년 아르메니아에서, 1941년부터 발칸반도에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북 수단에서, 1971에서 1979년까지 우간다에서, 1960년대부터 부룬디·르완다 등에서,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에서, 1971년 방글라데시에서, 1975년부터 1979까지 캄보디아에서, 1990년대에 발칸반도에서 수십만 또는 수백만씩 양민들이 집단학살되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신은 죄를 짓고 두려워 숨은 아담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아 
부른다. 그런데 참혹한 제노사이드 현장에서, 또는 그에 관한 처연한 소식을 접하며 
사람들은 오히려 “신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외쳐 부르게 된다. 그 끔찍한 광란과 살육 
시간에 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따지게 된다. 바다를 가르고 해를 
멎게 하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신이 왜 이 같은 집단살육을 
막지 못하는가, 사람 가죽을 벗겨 구두를, 체지방으로 비누를, 머리털로 담요를 
만드는 광기를 왜 차단하지 못하는가 하고 탓하게 된다. 
 내 생각에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죄짓도록 내버려 두었는가’라는 고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  질문에도 사실인즉 이 같은 억하심정이 들어있다. 자, 그럼 알아보자. 
도대체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죄짓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락된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잠시 정리하고 가자. 지난호에서 우리는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 죄란 무엇인가”라는 이 회장 
질문에 대한 기독교 답변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거짓말, 도적질, 강간, 살인과
 같은 도덕적 또는 법률상의 죄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을 거역하고 떠나는 것’ ‘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 
그럼으로써 일찍이 캔터베리대주교 안셀무스가 열거한 모든 가치들(본질·
생명·행복·정의·지혜·진리·선·미·불사성 등)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도덕적 또는 법률상의 죄를 짓는 악행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이 회장 질문인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죄짓도록 내버려 
두었는가는 당연히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신으로부터 돌아서 떠나게 내버려 
두었는가, 그럼으로써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요구되는 모든 소중한 가치들을 
상실하게 하였는가, 그 결과 거짓말, 도적질, 강간, 살인, 심지어 제노사이드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게 하였는가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에 대한 아주 간명하지만 매우 자극적인 답을 일찍이 프랑스 문호 앙리 
스탕달이 이미 해놓았다. “신의 유일한 변명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다”라고! 같은 말을 독일 철학자 니체가 1882년 출간한 그의 ‘즐거운 학문
’에서 더 강하고 보다 열정적으로 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가 그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 입에서 나온 선언들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임에 틀림없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신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서 돌아서서 떠나는 
죄를 짓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대변되었던 기존 기치들을 상실하고 제노사이드와 같은 
끔찍한 악행들을 하도록 놓아둘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신의 죽음! 당연히 이것은 기독교 답변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회장이 물음을 던질 때 깔아두었던 은밀한 의심이고, 나와 당신이 
신에 대해 생각할 때 자주 떠올리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뿐만 아니라 니체를 
계승한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딛고 서있던 굳건한 디딤돌이기도 하다. 
 예컨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라고 규정할 때나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가 카뮈 소설 ‘이방인’ 주인공 
뫼르소에 대해 언급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다”라고 설파할 때에도, 신의 죽음에 의한
 ‘죄짓도록 내버려둠’과 ‘악행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둠’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기독교는 
신은 영원히 살아 있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을 창조할 뿐 아니라 
보전하고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시종 변함없이 주장해 왔다. 
비록 인간이 그를 거역하고 떠나는 죄를 아담 이후 부단히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물은 신의 선성과 닮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창조되었다”
라는 중세 가톨릭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 선언이 그것을 대변한다. “창조는 
구원 시작이요, 구원은 창조 목적”이라는 20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 주장도 그것을 확인한다. 
 요컨대 신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죄짓도록 또는 악행을 저지르도록 수수방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신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죄와 악행들로부터 구원하려고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고”(이사야 40:28) 
애쓰며, 신구약성서는 오직 그 같은 신의 구원 사역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을 믿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당신 자유다. 하지만 그에 
앞서 어쨌든 그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알아보자. 선택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