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예배에 불교 스님이 교회강단에 서는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2012. 12. 28. 08:23성경 이야기


  불교의 스님이 성탄축하 예배에 참석하여 강단에 서서 설교비슷한 말씀으로 축하메세지를 전한 일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정말 종교간의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는 때에 이런 행위가 과연 화해와 상생,사랑,

포용의 태도인가? 아니면 종교혼합이요 정체감을 흐리게하고 근본교리를 무너뜨리는 일인가? 몇교회가 

이런 일을 선행함으로 솔선수범이요 마음이 더 포용적이고 종교화합에 앞장선 목회자로 여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자의적으로 정통을 무너뜨리는 일인가? 이런 일로 세상에 긍정적으로 비친다고 할찌라도 

교회내의 전통과 교리적으로는 온당한 것인가?


태생적으로 불교는 그들의 자비와 범심론적인 교리로 인하여 좀더 포용적이고 범종교적인 자세를 보여준 

것이고 기독교는 유일신과 예수의 유일성 교리로 말미암아 범신론적인 타 종교에 비하여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로 비쳐왔고 또 그로 말미암아 역사에 월등히 더 많은 박해를 받아 온것이 사실이다. 

그런 것으로 역사에 불교는 더좋은 종교요 기독교는 배타적인 종교다라고 단순논리로 평가할순 없다.


그러면 초대기독교와 한국초대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한 자세는 어떠 하였는지? 또 종교간 특히 

불교와의 종교화합은 어떤 자세로 견지하였는가? 성경은 어떻게 말하며 하나님의 뜻은 무었일까?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들은 많은 혼란속에서 우왕좌와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종교적대화와 

연합에 대한 신학적인 분명한 가이드를 정립하여 주어야 할 때이다.


물론 자유주의적인 신학을 갖인 교회들은 일찌기 그런 일에 좀 자유로운 태도를 가져왔지만 정통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교회들은 상당히 거부적인 입장일 것이다.

(참고로 위의 교회는 장로교 통합측과 기장측 교회인데 대체로 기장측 교회는 사회복음주의 운동에 많이 

치중해 온 교단이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여론위에 교회가 서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교회가 가지고있는 고유한 가치와 영역이 

있고서야 비로소 사회와 타 종교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좋은 약이 그 약효과가 

있고서야 병자에게 약효를 줄수 있는 것과 같다. 고로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어떠한가에 

우리는 집중하여야 한다.


성경과 기독교역사를 조금 아는 신자라고 한다면 기독교가 왜 배타성이 있고 또 박해를 많이 받아 

 왔던가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도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으로 자기 백성에게 그 전통에서 최선을 다 하였지만 결국 그들의 전통종교에

 의하여 사형언도를 받고 처형되고 그의 제자들을 중심한 그리스도교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교회를 로마세계 까지 확산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그러하여 결국 그들의 유대종교에 

배척을 당하고 로마종교의 박해로 순교를 당하였다. 그 이후로 기독교는 모든 세계 세상정치와 

이교에 전파되면서 수많은 박해를 받고 순교의 역사를 가졌다.


왜 그런가? 이 종교는 로마와 그리스의 다신론, 인신론, 사마니즘의 범신론등과는 그 신관과 

구원관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다름이 바로 기독교의 매력이고 복음이요 생명이다. 

이 다름이 바로 약점이 되고 이로서 고쳐야 할 부분이라면 기독교의 존재자체는 필요가 없어지고 만다.


그 다름이 무었인가?

사도신경에 요약되어 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믿고 다른 신을 믿지 않는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아들 독생자로 믿고 그분이 흘린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죄속함을 받고 

 그분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요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여호와 유일신을믿는 이스라엘 성민들에게는 애급에 내려가지말라, 그들의 말을교류하지말고 

가나안땅 약속의 땅에 벗어나지말라, 이방종교의 여인과 결혼하지말라고 다른나라로 이사하지도 말라.

 철저히 혼합을 금하셨다.


왜 하나님께서 연약하셔서인가. 세상이 더 강하고 여호아신이 약해서인가? 노아의 시대 심판의 기준이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이 세상의 불의한 딸들고 혼합하였기 땜누이라고한다. 죄와 마귀사타의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의 죄의 문화에 적은 무리가 본존되기 힘들다는 것을 전제하고있기 때문이다. 

윌는 많은자가아니고 보수하고 파수하여야한는 입장이다. 세상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소수요 지켜 나가야 할 존재이다.


그러므로 분리보다 거룩성을 구별하여야한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도 이와 다르지않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천국을 너희에게 주실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 빛고 어두움이, 성전과 우상이 어찌 함께 할 수있으리요. 따로나와 있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우리가 세력이 적은 무리가 아니고 다수일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런 전재로 볼때

타종교가 우리의 교회와 교회문화에 들어와서 인사하기를 원하고 찾아 올때는 결코 거절하지말 것이다. 

손님으로 받을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무어라하겠는가?

결코 손님으로서는 받아 들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단상 중앙에 세워서 설교비슷한 일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 단상이 구약의 성전개념이 아니라해도 적어도 예배시간자체가 거룩한 성령과 하나님의 

영과 교류하는 시간이 아닌가? 세례받지 않는 자마저 예배의 위원으로 세우지 않는 례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옹졸하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위축적인 자세가 

아니라 사랑의 종교요 포용적인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면 다른 종교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도덕적인 일에는 협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시간이어서는 안된다. 

교회밖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왜 예수님은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채찍으로 상을 엎고 몰아내었던가?. 교회가 

성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곳에 그들을 세울순 없다. 구원받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의 진정한 축하하는 진정성이 얼마나 있는가도 따져 보아야 한다. 왜냐? 

불교가 종교자유 연합회를 통하여 얼마나 기독교를 간접적으로 억압조장하고 있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들이 교회를 찾고 성탄축하츄리를 절앞에 세워서 축하한다 할찌라도 그것마저 불교포교정책중의 

하나로 하지는 않는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아직 불교는 대중적인 것이요 기독교는 아직 어린역사에 어린 신자가 많다. 세상의 문화나 

세상종교에 우리는 정체감을 잃고 함몰되어 교회가 세속화 되어지는 역사를 많이 보아왔다. 

하나님은 이를 우려하신다.

동시에 우리는 기독교가 세상에서 이제 좀더 편협하고 타종교에 지나친 무례를 범하지 말고 

무분별적 선교적인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다고 하여 방법이 

비도덕이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망하게 하는 꼴이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속히 임하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이다(주기도) 그리고 이 나라와 백성이 민족종교로서 우뚝 서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송은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