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들림 간구했지만 휴거는 없었다, 다미선교회

2012. 12. 29. 11:08지구종말론


***다미선교회의 휴거소동은 진짜 다가올 휴거에 대한 본질을 흐리게 하기 위한 양치기소년이었다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47&contents_id=17901&leafId=47


항상 그랬듯 ‘마야달력 종말론’도 허구로 판명이 났다. 2012년 12월21일, 지구상 그 어디에서도 ‘세상 끝 날’의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새벽 오스트레일리아 퍼스에서 회오리 섬광이 목격돼 “지구 종말의 헬 게이트(지옥의 문)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기는 했다. 하지만 “그 섬광은 호주 남부에서 자주 나타나는 오로라일 뿐”이란 설명이 나와 소동은 싱겁게 가라앉았다.

 

허구로 판명 난 ‘2012년 마야달력 종말론‘

물론 이번의 허황된 종말론에서도 배울 건 있었다. 지구가, 인류가, 역사가 종언을 고한다는데도 인간이 가진 고유한 무기, 상술(商術)은 더 극성을 부렸다. 지구와 인류야 사라지든 말든 눈앞의 이득부터 취하자는 부류들이 ‘종말’을 상품화해 잇속을 챙겼다. ‘그날’ 인류 최후의 피난처로 소문난 프랑스와 터키 산중마을엔 온갖 사람이 몰렸다. “세상의 끝 날, 나는 거기 있었다.”는 문구가 새겨진 셔츠와 컵이 불티나게 팔렸다. 미국과 유럽 대도시에서는 아예 각종 생존시설을 갖춘 방공호까지 억대 상품으로 등장했다.

 

술렁였던 전세계와 달리 차분했던 한국, 왜?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 절정 
1992. 8. 1 [경향신문] 15면

세계가 그토록 술렁였지만 우리는 달랐다. 조용했다. 일부 네티즌 간에 종말론 화제가 오갔지만 단순호기심을 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우리만 차분했을까. 허황된 얘기를 믿지 않는 국민의 현명함 때문에? 그렇게 믿고 싶지만 그보다는 “학습효과를 본 덕”이라는 설명이 그럴듯하다. 우리는 그간 숱한 종말론을 접하며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특히 1992년이 그랬다. “믿는 자만 재림예수에 의해 공중 들림을 받는다.”는 ‘휴거 종말론’을 TV가 현장 중계하는 소동까지 빚고서야 “종말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했다.

물론 그 후에도 99년 ‘노스트라다무스 종말론’, 2000년 ‘y2k 종말론’을 겪기는 했다. 그러나 92년 휴거 파동이 워낙 컸기에 당시 우리 DNA에 “시한부 종말론은 모두 허구”라는 믿음이 철저히 각인됐는지 모른다. 정통 기독교단이 “휴거를 전파하는 교회는 이단”이라 규정하고 당국과 언론도 “헛된 종말론에 현혹되지 말라. 휴거란 없다”고 강조했지만 믿는 이들에겐 ‘그날 그 시간’을 향한 시계가 1초의 오차도 없이 흘러갔다. 보통사람들은 “설마… 혹시…”하는 심정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예고된 휴거, 그날을 지켜봤다.

 

1992년 10월 28일 그날은..

오늘밤이 ‘그날’…종말교회 표정 
1992. 10. 28 [한겨레] 15면

자, 그러면 20년 전 바로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1992년 10월 28일 자정이다. 아니, 자정을 서너 시간 앞둔 때다. 이미 전국 166개 휴거 신봉 교회와 기도원에는 경찰 추산 8600명의 신도가 몰렸다. 며칠 전에 교회 입장권을 받았거나 ‘목사님으로부터 휴거 확약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울며불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간절히 ‘들림’을 갈구했다. 휴거인도를 위해 제단에 선 목사는 시계가 째깍거리며 12시를 향해 다가갈수록 더욱 목청을 높였다. 목사의 설교소리와 신도들의 울부짖음, 몸짓, 갈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정말로 섬뜩한 종말의 분위기가 교회에 가득했다.

휴거 종말론의 총본산이랄 수 있는 서울 마포구 성산동 다미선교회에는 특히 비장감마저 돌았다. ‘다가올 미래(다미)에 대비하라’는 책과 설교로 이 땅에 엄청난 휴거 열풍을 몰고 온 그곳 이장림 목사는 자신이 예고한 휴거 한 달 전 검찰에 구속됐다. 당시 검찰은 “이 목사가 종말론을 내세워 신도들에게 재산을 교회에 헌납토록 유도하고 그중 33억 원을 교회 아닌 자신 명의로 헌납 받았다”고 했다. 또 “그의 집에서 현금 수표 1억9천3백만 원, 환매채 3억 원, 미화 2만6천 달러가 발견됐으며 이는 모두 ‘개인적으로 헌납 받은’ 돈”이라고 밝혔다. 죄명은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이었다.

‘휴거헌금 ‘ 사기죄 적용 쟁점
1992. 11. 5 [동아일보] 21면

검찰조사 결과 이 목사에게 1천만 원 이상을 헌납한 신자만 30여 명에 이르렀다. 일부는 “정확히 10월28일, 휴거의 그날까지 살 생활비만 남기고 전 재산을 탈탈 털어 헌납”하기도 했다. 웃기는 것은 이 목사가 가지고 있던 3억 환매채는 지급만기일이 93년 5월이어서 휴거가 있고난 7개월 후에야 찾게 돼있다는 점이다. “예수를 따라 공중에 들어 올려 질 사람”이 들리고 한참 후에야 찾는 채권을 뭣 때문에 가지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그걸 아는 신도들이 여전히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도 불가사의였다. “선지자들은 박해를 받게 마련”이라고 믿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휴거를 믿는 신도들과 반대하는 기독교신자들로 ‘대소동’

“오늘 24시” 경찰 휴거 비상 
1992. 10. 28 [경향신문] 23면

이날 밤 다미선교회 부근에는 경찰병력 1천여 명과 소방차 구급차까지 긴급 출동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진짜 휴거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지는 대로 대처하고, 또 불발되면 일어날 수 있는 패닉 성 자해나 교회 관계자들에 대한 폭행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날 선교회 측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휴거 예배” 를 위해 교회 정문에 가로 3m, 세로 2m 대형 꽃 아치를 세웠다. 주차장에는 예배 생중계용 멀티비전도 설치했다. 이미 사흘 전 열성신도 1500명에게 출입증을 주었으며 “가정 등 주변을 정리하고, 가볍게 들릴 수 있도록 가방 등 소지품 없이 휴거 예배에 참석하라”는 행동지침까지 내려놓았다.

그뿐인가. 선교회 정문 앞에서는 휴거종말론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기독교신자 상당수가 모여 반대집회도 열었다. 그들은 “거짓 믿음, 휴거 쇼는 끝났다” “이단 사이비 종교가 기독교를 망친다.” 등 유인물을 뿌리며 “다미선교회 해체”를 목청껏 외쳐댔다. 그러니까 10월28일 자정 전후 다미선교회 안에서는 간절히 들림을 기도하는 열성신자들이 울부짖고 있었고 밖에서는 수천 인파가 뒤엉켜 일대 혼란이 벌어진 것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경찰, 휴거를 이단으로 규정한 종교인, 휴거종말론에 빠진 가족을 되찾으려고 온 사람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자는 구경꾼과 이 모든 정황을 취재하는 국내외 보도진들이 뒤엉킨 인간 군상이었다.

 

10월 28일 24시, 휴거는 없었다.

10.28 휴거는 없었다
1992. 10. 29 [한겨레] 15면

자정 직전 선교회 안 열성신도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이제 들림 받는다.” “믿습니다. 주님! 주님!” “천년왕국에 들겠나이다.”등 기도문을 외치며 신도끼리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폴짝폴짝 뛰기도 했다. 재림예수께서 직접 들어올리기 전에 먼저 가볍게 공중에 떠있음으로서 조금이라도 그분의 수고를 덜겠다는 간절함의 표시였다. 밖에 사람들도 흥분하긴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무슨 말 같잖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정이 다가오자 “혹시 정말 이뤄지는 것 아냐?”하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듯 했다. 가정에서 TV뉴스 생중계를 보던 시민들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려는 듯 공연히 한숨을 쉬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자정의 순간은 기다림과 달리 지극히 짧게 지나갔다.

사실 우리는 가정과 전 재산까지 바치며 한 교리에 빠졌다 모든 게 허무한 거짓으로 끝나는 순간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날 밤 다미선교회에 모인 사람들, 아니 전국적으로 휴거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휴거 불발 후 느낀 감정을 객관적 구경꾼이 설명하기는 무리란 얘기다. 다음날 신문들은 허탈 실망 분노 등 단어를 사용하며 일부 신도들이 기물을 부수고 목사를 폭행한 사실을 보도했다. 또 일부신도가 “하나님 사정으로 날짜가 조금 연기됐지만 휴거는 분명히 온다.”거나 “에러가 있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며 통곡했다는 보도를 통해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종말론

“10.28 휴거는 역시 허구” 헌납 재산분쟁 후유증 클 듯 
1992. 10. 29 [동아일보] 23면

그날 다미선교회 앞에서 “휴거 사이비 쇼는 끝났다. 이단자들은 사죄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던 사이비 종교 연구가 탁명환 씨는 새벽 귀가 중 집 앞에서 괴한의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그는 ‘시한부종말론 피해자대책 협의회’ 구성을 주도하며 “10.28 휴거 주장은 이단”이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 때문에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에 시달렸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이 테러에서는 다행히 살았으나 2년 후 또 다른 신흥종교의 비리내막을 폭로하다 광신도의 칼에 찔려 숨졌다. 휴거 불발 6개월 후인 93년 4월에는 20대 청년이 자살했다. 이로서 휴거 관련 자살자는 2명이 됐다.

다미선교회는 11월 2일 일간신문에 광고를 내 휴거로 민심을 어지럽힌 데 대해 사과했다. 선교회 이 목사는 1년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93년 9월 출소했다. 그는 다시 목회활동을 하면서 설교를 통해 “10.28 휴거 론은 분명한 실수였다”면서 “그러나 기독교 역사가 계속되는 한 휴거의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당시 종말론 신도 중 일부는 다시 ‘94년 휴거’를 주장하며 합숙 예배활동에 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94년에도 휴거는 이뤄지지 않았다. 2012년 마야종말론이 허구로 끝나자 일각에서 다시 2015년 종말론이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도 쇼로 끝날 것이다. 마야문명 발상지 남미에서 그러했듯 종말로 왜곡 해석됐던 13박툰을 보냈으니 새날을 맞는 축제, 찬란한 기쁨으로 2013년을 맞았으면 한다.

글: 민병욱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