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목사의 눈물-목사가 우는 이유

2013. 1. 8. 08:34성경 이야기

"오늘도 나는 또 웁니다.
무능해서 울고 부족해서 웁니다.

성도의 삶을 보면 가슴을 치며 또 웁니다.
아무것도 도움이 될 수 없는 내가 싫고 내가 못나서 그래서 나는 오늘 또 웁니다.
교회를 보면서 그저 웁니다.
주님을 보고 교회를 보면 송구스러워서 웁니다.

감사해서 웁니다.
구원받은 것이 감사요, 목사가 된 것이 감사요, 아빠가 된 것이 감사해서 웁니다.
성도가 있어서 감사하고, 교회가 있어서 감사하고, 주님이 있어서 그래서 목 놓아 웁니다.
한없이 감사해서 무작정 울고 또 웁니다.
나는 울보, 울보 목사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뜨거운 고백을 서두에 이렇게 소개한 이유는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것이 목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세습을 후회한 김창인 목사님도 울고, 재정 비리를 반성한 조용기 목사님도 울고, 그리고 교회 부패를 슬퍼한 옥한흠 목사님도 울었습니다.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목사를 자주 울게 만드는 시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반면에,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은데 울지 않는 목사도 있습니다. 교회 공금 횡령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은 별로 울지 않습니다. 여신도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하고 오히려 당당한 목사님도 있습니다.

필자의 가족 중에도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북미 지역의 한 작은 한인 교회를 20년 동안 섬기셨습니다. 아직 은퇴는 다소 이르지만,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조기에 사임을 하였습니다. 후임자 선정은 모두 교회에 일임하고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퇴임 시에는 교회가 조금 성장하여 출석 교인이 약 600명 정도 되었는데 교회의 규정에 따라 받은 퇴직금은 5개월분의 급료가 전부입니다.

본래 교회 사례비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집은 물론 미리 모아 놓은 목돈 역시 없습니다. 몸은 많이 망가졌고 전임 목회를 하기는 힘듭니다. 퇴임 후 어느 날인가는 집에서 두 시간이나 왕복해야 하는 어느 농촌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시고 선물로 계란 두 판을 받아 오셨습니다. 연료비조차 안 되는 적은 답례이지만 안쓰러워하는 아내 앞에서 그냥 웃으십니다.

어찌 이 목사님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많은 목사님이 장래에 대한 변변한 대책이 없이 목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의 노후 준비는 제대로 못 하지만 눈물 젖은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래도 사역으로 인한 어려움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습니다. 목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동료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비리입니다. 그 부정과 부패가 하도 심해 거룩한 직분의 정당한 권위가 길바닥까지 떨어지고 요즘은 동네 강아지마저 흘겨 볼 지경이 되었습니다. 변명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 강단에 엎드려 또 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교단의 무분별한 성장 의욕으로 신학교가 너무 난립하였습니다. 자격 논란에 관계없이 해마다 수천 명의 목회자가 새로 쏟아져 나옵니다. 영국 교회 전체 목사 수보다 두세 배나 많은 목회자가 한국에서는 매년 배출되고 있습니다. 결국 '성장' 욕망이 '성숙'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니 쭉정이는 없고 알곡만 있기를 바라는 것이 도리어 망상입니다. 그 결과 양들이 피부로 느끼는 현실은 이미 '먹사'가 '목사'를 크게 압도하고 있습니다.

노회, 연회, 총회, 그리고 기독교 연합 단체 그 어디를 보아도 근엄한 가운을 입고 위선 떠는 패거리 잡배들이 없는 곳이 드물고 각종 비리로 악취가 진동합니다. 지역 교회들 또한 변질된 교권에 눌려 우민화하고 저질화하여 소통이 불통이 된 곳이 적지 않습니다. 소위 종이란 자들이 변절하여 상전이 되고 교주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는 40일 특별새벽기도 했다고 별도의 사례비를 받아 갑니다. 또한 부흥회 마치고 강사 목사와 동일한 금액의 사례비를 받는 것이 '교회의 아름다운 관례'라고 하며 돈을 가져가는 목사도 있습니다. 심지어 안식년을 여섯 조각으로 분할하여 매년 유급으로 두 달씩 푹 쉬겠다는 기상천외한 목사도 있습니다.

물론 아름다운 교회와 순수한 목회자들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일부의 이야기이겠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습니다. 저런 비상식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목회 풍토가 갈수록 저급화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여튼 목사 동문회인지 종교 상인 노동조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기적으로 비싼 밥 먹고 모여 앉아 그런 잔머리만 굴리고 있는 무리들이 따로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진정으로 교회의 순결을 훼손하고 양들을 울리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지금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모두 염려가 크지만, 이들만은 배부른 잔치에 신이 났습니다. 철 따라 양털을 깎아 재물을 땅에 쌓고, 출출하면 양을 잡아 포식하고, 양들을 담보로 빚내어 축사를 확장하고, 그리고 그렇게 세운 목장을 통째로 새끼 이리에게 물려줘도 염소들이 앞장서서 마냥 좋다고 화답합니다. 도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러니 목사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으로 위장한 대형 축사 속에 날마다 찢기는 양들이 불쌍하고, 이리를 따라 무저갱으로 향하는 염소가 불쌍하고, 그리고 말씀 기근으로 누렇게 메말라 가는 저 초장을 보며 안타까워 웁니다.

지금은 울어야 할 때입니다. 공교회마저 하나님의 공의를 상실하고 죄로 어두워진 이 시대에 울지 않는 목사는 거짓 목사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평안을 노래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악인이 웃는 세상에서는 의인이 울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울었습니다. 호세아도 울고, 예레미야도 울고, 그리고 바울도 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백성도 울었습니다. 포로 된 땅 바벨론의 강가에 앉아 예루살렘 시온 성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무너질 성전과 삶에 지친 민초들을 보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거룩한 교회는 그 눈물로 지신 십자가 아래 세워졌습니다. 눈물은 사랑입니다.

목사는 참목자 되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직분입니다. 착한 목사는 양들을 위해 울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성도들의 상처를 씻겨 주고 교회를 새롭게 정화할 수 있습니다. 이리는 양들을 위해 결코 울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눈물'이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샬롬!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신성남canavillage@yahoo.com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글쓴이 : 영심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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