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후 휴거설, 유동근목사

2013. 1. 28. 15:44성경 이야기

유동근목사, 휴거의 소망



‘성숙한 신앙인’ 아가서 8장의 시작

▲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아가서는 주님과 믿는 이의 사랑 이야기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체험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잘 그려준다. 여기 나타난 주님을 사랑하는 믿는 이가 거친 많은 영적 단계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7장에서는 믿는 이가 성장해 주님의 동역자가 되고 주님과 함께 들로 나가 동네에 유숙하면서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성장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볼 수 있다. 성숙한 사람의 생각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육신의 한계의 돌파(휴거)에 대한 여인의 갈망

1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여인의 마음 속에 소망이 있는데, 이 소망의 대상은 분명 오라비는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밖에서 만나 입을 맞추고 싶다. 주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이 땅에서는 육신의 제한이 있다는 뜻이다. 그녀에게는 육신의 제한을 돌파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이전에는 주님을 다만 자신의 생명과 은혜로 누리고 주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8장에 이를 때 이 여인은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 만나고 싶은 휴거의 소망으로 가득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바깥에서 입을 맞추면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겠지만, 그가 오라비라면 그렇지 아니할 거라는 말이다. 이 여인은 육신의 한계를 돌파하고 싶은 것이다. 즉 공개적으로 주님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뜻이다.

이 장에서는 특별히 장성한 자의 영성의 특징들을 볼 수 있다. 그 첫째가 휴거를 사모한다. 이 땅에는 미련이나 소망이 없다. 주님과 함께 있기만을 소망한다.


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내 어미 집’은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지금은 육신의 제한이 있어 주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지만, 그곳에서는 주님께 직접 교훈을 받겠다는 것이다. 성숙한 성도였던 바울도 고린도후서 5장 1-2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라면서 휴거되기를 바랐다. 육신의 제한을 벗고 주님을 대면하여 직접 뵙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성숙한 성도들의 갈망은 최종적으로 주님을 직접 만나는 데 집중돼 있다.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하더라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심판대의 빛 앞에서 행하며 주님 만날 날을 기대한다. 주님을 만날 날과 그 일이 항상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며 그 빛에 통제된 생활을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마음에 있다.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있는 것이다(골 3:1-4). 대조적으로 어린 신자들은 주님 오실 날은 멀리 생각하고 이 땅의 많은 일에 붙잡혀 있다. 장성한 신자는 하늘에 계신 주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의 얼굴 빛 아래서 가르침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녀는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일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하늘에 계신 당신께 마시우겠습니다.’ 2절은 장성한 자의 마음이 늘 하늘의 주님으로부터 교훈을 받고자 하며 그녀의 일이 주님의 기쁨과 누림이 되기 원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이 땅에서의 수고가 전혀 자신을 위한 것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모두가 주님이 마시기 위한 향기로운 즙이 되기를 원한다.


3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가정법이다. 주님이 전에는 영적인 임재로 믿는 이를 안아 주시고 품어 주셨지만 이제 믿는 이는 주님을 직접 만나 그분 품에 안기기를 바라고 있다.


4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이 성숙한 성도는 휴거의 소망 가운데 살고 있다. 주님은 그렇게 휴거의 소망으로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이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 않고 지켜지기를 부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육체의 어떤 것으로 간섭하지 말고 여인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여인이 깨어나는 것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휴거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휴거에 대하여

성경에는 휴거의 사상이 있다. 휴거(rapture)란 주 예수님께서 재림(parousia)하실 때 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 믿는 이들에게서 발생한다. 사도 바울은 휴거에 대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라(고전 15:51)”고 휴거의 사상을 전달한다. 여기서 마지막 나팔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중 마지막 번째 나팔로 보아야 하며 결과적으로 성도의 휴거는 대환난의 끝이며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시며 지상 재림 직전의 일이 됨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도 휴거의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는 역시 주님이 강림하실 때 살아있는 성도들에게서 발생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에 보면 살아남은 자들이 주님 재림시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상기 말씀들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을 종합할 때 교회의 휴거는 환난 후에 이뤄지지만(죠지 뮬러, A.B. 심슨, 제임스 라이트, 뉴톤, A.J. 고든, 무어헤드, 헨리 프로스트 등), 신실한 자들은 환난을 피하고 환난 전에 휴거된다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다(눅 21:36, 계 3:10, 14장 전체 참조-Hudson Taylor, Robert Chapman, Robert Govett, G.H. Pember 등). 마태복음 24장에는 주님의 재림 때를 언급하고 있는 바,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다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했는데 곧 휴거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데려감을 당한다(paralambano)라는 헬라어는 다른 성경구절에서 다 적극적인 용법으로 쓰여진 단어다. 요한복음 14장 3절의 ‘처소를 예비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여’라고 할 때 영접한다는 말이나 마태복음 17장 1절의 ‘주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라고 할 때의 ‘데리시고’ 등에 쓰여진 말이다. 이는 다 주님이 믿는 이들을 데리고 가실 때 쓰는 말이므로 적극 용법으로 사용됐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사용한 ‘파라람바노’는 주님의 재림과 환난의 때를 말하므로 더 적극적인 말로 쓰였으며, 결국 휴거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한 버려둔다(마 24:40)는 말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에서 쓰였는데 이는 소극적으로 쓰였다. 이 구절의 해석에서 주님에 의해 버려둠을 당한다고 할 때 그 말은 절대로 적극적으로 볼 수 없는 단어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들은 도적이 어느 시에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과 연결돼 있는데, 주님은 도적같이 오셔서 귀한 물건을 훔치러 오시는 분으로 비유돼 있다(마 24:43).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적을 맞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을 깊이 이해할 때 도적을 맞아야 축복이 된다. 진짜 강도라면 도적을 맞지 말아야겠지만, 여기서는 도적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도적을 맞아야 축복이 된다. 주님은 귀한 보물을 훔치러 오신 분이다. 그분은 깨어 기다리는 신실한 성도를 보물로 여겨 훔치실 것이다. 이는 40절과 41절의 데려감을 당하는 것에 이어 하신 말씀이다. 어떤 도적이 집에 들어가서 귀하지 않은 물건을 도적질하겠는가? 우리가 만일 주님의 눈에 귀한 보물같이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날 주님에 의해 데려감(도적질)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손에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주님의 것이 되기 위해 그분께 도적질 당하는 것은 해가 아니라 도리어 축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 땅에서 생명의 성장과 변화를 체험하지 않고 귀한 보물로 변화되어 있지 않다면 주님은 결코 우리를 훔치러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데려가고 훔쳐가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휴거다. 생명의 성장과 변화를 통해 그분을 닮아가고 진정으로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다면 주님은 약속대로 그분의 말씀대로 시험의 때(대환난)를 면하게 하실 것이다(계 3:10, 눅 21:36). 그리고 하늘의 시온산인 보좌 앞으로 들어올리신다(계 14:1-5). 이것이 휴거이며, 사도 바울 같이 성숙한 사도는 이 땅에서 사역하는 가운데 휴거의 소망을 강하게 피력했다(고후 5:2-4).


오늘 우리는 모든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볼 때 휴거의 시기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썩어질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을 바라며 사는 성도가 아니라면 휴거될 기대는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온 마음이 깨어서 주님만을 바라고 살며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을 때만이 어느 날 주님께로 들림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는 휴거의 예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실제로 없어지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다. 신약에는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렇게 될 것이라 말한다. 또 곧 이어질 주님의 재림과 환난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