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정상 모리아 산을 향하여 … (3)

2013. 5. 24. 11:25성경 이야기

 

 

 

 

 

신앙의 정상 모리아 산을 향하여 … (3)

창세기 22:7~8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또는 내 생명이 다 하는 그 순간까지  

신앙(信仰)의 정상(頂上)을 향하여 끊임없이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신앙의 정상에 설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비로소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목사라 해서 이제 다 되었다 할것도 아니요,  

나이 많은 목회 은퇴자라 할찌라도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셨던

신앙의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또 올라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과 신앙에는 정년(停年)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은 그 속에 있는 믿음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성경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셨던 기준도 모두 저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가장 마음 아파하시고 한탄을 하셨던 것도 

"저희의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가장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놀라워 하신 것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복에 복을 주시고 응답을 하신 것도

"가라 네 믿은데로 될찌어다"

 

마지막 때를 내다보시며 안타까워 하신 것도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니 오늘 우리와 교회의 불행이 환경 때문도 아니요, 돈이 없음도 아니요 

주를 믿는다는 교회가, 성도가, 그리고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이 통탄할 일입니다.

 

교회밖의 사람들이야 불신앙의 세계이니 저희들에게 믿음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교회가 믿음이 없다는 말은,

은행에 돈이 없다는 것보다 더 기가막힌 사실인데,

오늘의 교회에서 믿음이 없다는 말이 심각한 문제로도 생각지 않습니다.

 

만일에 은행에서 돈이 없다고 한다면  

당장에 문제 해결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느라 

여러 비상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은 믿음이 없어져도 놀라지도, 신경도 쓰지 않는 이유는  

다른 세상적인 외형의 것들 곧 돈, 권력,명예 등등이 대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 우리들의 믿음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천태만상입니다.

 

이 말씀을 증거하는 나 자신도 얼마전에 어떤 분을 만나서 대화를 하는 중에 

내 믿음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래도 목사요, 오랜동안 믿음의 말씀을 설교해 온 목사로서 내 속에는 

반듯하게 바로선 믿음, 옯바른 믿음이 있노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정작 어느 부분을 점검할때에 너무도 부분적인 믿음, 보잘것 없는 믿음,

맡기지 못한 믿음 곧 많은 불신앙들이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되었을때 슬펐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 놓을만한 믿음이 없고, 너무도 보잘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믿는다고 하나 실상은 믿음도 아닌 무늬만의 믿음이 교회안에 수두룩하고 

벌벌 기어다니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똥오줌도 못가리는 믿음들이 넘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믿음 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를 원하는 믿음이 많고

자기 생명까지도 전폭적으로 맡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네, 드리겠나이다, 하는

그런 믿음은 정말 찾아보기가 희소(稀少)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휴거를 바라고 사모하지만  

자신이 주님의 신부들이라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만한 믿음이  

과연 얼마나 있느냐?고 할 때에 "글쎄요"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 19:10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당신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복이 있는 신부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어떤 믿음의 소유자인지 자신의 믿음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점검을 하고 또 점검을 하여 어떠한 흠과 티가 있고 점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믿음의 사람이요, 이만하면 주님의 신부가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안도한다 해도 실상은 누가 옆에서 조금만 쿡 찔러도

혈기가 올라오기 일 수이고,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믿음이 있는 척 하나요? 

 

대환란에 죽을까봐 무서워서 얼른 휴거되고 싶어 안달복달 한다면은  

그것은 자기 안일과 욕심만 챙기는 사람이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는 함량 미달입니다.

 

누가 조금만 높여주어도 속에서 금방 교만이 올라와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도 

주님의 신부로서는 절대 함량미달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도 휴거의 헛꿈을  

꾸고 있는 것도 주님의 신부로서는 함량미달입니다.

 

누가복음 17:4에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루에 같은 잘못을 일곱 번 짓고, 또 일곱 번을 돌아와서 잘못을 빈다면 

그 잘못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용납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머리를 흔들고 펄펄 뛸것이니 이런 기준에 들어갈 주님의 신부가 얼마나 될까요!

 

하루에는 고사하고 일년에 아니, 평생에  

우리에게 같은 잘못을 세번만 저질러도  

용서를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다른 잘못을 저지른다면 혹 용서할 수 있어도 

같은 잘못을 똑같은 방법과 모양으로 저질르고  

세 번만 용서를 빈다해도 용서하기가 쉽지가 않고  

혹시 부득히 말로는 용서를 한다 해도  

마음속에는 상처를 갖고 삽니다. 

이 마음 속의 상처가 흠이 되고, 점이 되고, 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용서를 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거나 찾아왔을때 

외면해 버린다면 입으로만 용서했을 뿐 실 

상은 중심으로는 용서를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주님의 흠없는 신부라고  

착각을 하면서 사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아직 멀었다고 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은 많이 다듬고 깍아야 할 부분이 많은  

흠,점,티가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랑되신 주님이 되었다고 인정을 하실 때까지  

부지런히 단장하기 위하여서 신부의 정상  

곧 신앙의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시간이 많이 남지 않기 않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신앙의 정상을 향하여 

오늘도 힘쓰고 애써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같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정상 코스를 따라 올라가길 권합니다.

 

7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아브라함의 부자가 모라야 산을 올라가면서 하는 대화 내용을 보면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상황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바로 옆에다 두고

"내가 여기 있노라" 하고 말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장작을 지고 올라가는 이삭에 비하여  

빈몸으로 올라 가면서도 발걸음이 너무도 무겁기 때문에  

아무래도 뒤쳐져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도 인간인데 산위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독자를 죽여야하기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들었겠는가,  

인간적인 갈등이 왜 없었겠어요?  

 

그 모든 독자 자식을 향하는 인간적인 애절함과 아픔을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이기고 올라가고 있는 것이지만  

육정이 있기 때문에 몸이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빈몸으로 올라가면서도 장작을 지고 올라가는 이삭보다  

뒤쳐져서 올라갈 것이라고 추론해 보는 것입니다.

 

하늘 삼층천을 보았던 영계의 거장 바울도  

독신으로 혼자 살때에 인간적인 갈등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한탄을 했었지만 

곧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했으니

육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갈등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곧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하였다는 것이 오늘 믿음이 적은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간도 쓸개도 다 빼어놓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다해도 그도 육을 뒤집어 쓰고 있는 인간으로서

갈등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 없이 산책을 하듯 

모리아산을 올라 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천사가 되어 이 시험을 치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순종을 하는가!

시험을 치루고 있는 상황이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장작을 지고 가는

자기의 독자 아들의 뒤를 따라서 올라가는 심정은 

우리의 심정과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오히려 100세에 얻을 수 없는 중에 얻은 독자이니  

젊어서 여럿을 얻은 우리와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더 아프고 쓰릴 것입니다만,

그는 믿음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적과 정막이 흐르고 있는데 그 것을 아들이 깨어 버렸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나님께 받은 이 명령을 자기 아내에게조차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품고 왔는데 

번제 할 어린양이 어디에 있느냐는 아들의 질문이 망치로 뒤통수를 치는 충격이었고

정말 아픈곳을 건드리는 것으로서 인간적으로 대답을 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이삭은 아주 어릴때부터 제사를 드리는 아버지를 늘 상 보아왔기 때문에 

번제를 드릴려면 소를 몰고 가든지 양을 몰고 가야 되는 것을 잘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 번제 드릴때 필요한 나무와 불은 있는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제일 중요한 어린양이 보이지 않기로 궁금해서 묻는 것입니다.

이삭이 이렇게 신앙의 사람으로 잘 자란 것은 아버지의 절대적인 영향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믿느냐? 어떻게 행동을 하고 있느냐? 아들은 그것을 보고 자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집에서 모든 것을 100% 보여줄 수 밖에 없는 부모보다 더 좋은  

선생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 만큼 부모의 책임을 다 해야할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자식들 앞에서 갖은 쌍욕을 해대고 함부로 살면서  

그 자식이 어긋난 길을 가는 것을 속상해 하는 하길래,  

옆에서 보면서 이것이 오늘 우리의 안타까운 현주소이구나! 하고

다시 나 자신까지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요사이 100만원도 더주고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선생님도 부모님만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고등학교 교사중에는 아이들 앞에서 담배 꼰아물고 음담패설을 하면서  

학교 지식과 학문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정말 자식을 잘못 맡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속에서 자식들을 옳바로 가르치는 진정한 선생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제단을 쌓는 것을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이삭입니다.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을 하는 것을 눈으로 보아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믿음과 순종의 모습이 이삭에게로 그데로 옮겨진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눈길을 앞을 쳐다보고 걸어가는데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낑낑대며 어른 발자국의 보폭을 밟고

따라오는 자식을 보고 아버지의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셔서 내 자식에게 부디 좋은 발자국을 남기게 하소서"

이것은 부성애에서 나온 기도이기도 하지만, 책임 있는 인간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의 발자국을 따라서 올라가는 이삭으로서  

정작 자신이 번제 할 어린양이면서도, 번제 할 어린양을 어디에 있느냐고 아버지에게

묻고 있는 질문에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야말로 명답이었고 사실이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승리하면 주실려고 이미 준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8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인간적으로 아브라함이 자기 입으로 네가 바로 번제할 어린양이다,라는  

차마 말을 하지못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심정으로 또 믿음으로 말을 했더니

실제로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말은 자기 자식을 바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준비하는 거룩한

예표가 되었으니 믿음의 말은 이처럼 고귀(高貴)합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말씀에 절대 순종을 하던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어린양으로 바치려다가, 실제로 하나님의 어린양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서 뵙게 되었습니다.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린양되신 예수님을 뵙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으로 가장 큰 복이라면 주님을 내 믿음의 현장에서  

뵙는 것일 것입니다. 그가 어떤 때는 내 아들의 모습으로,  

혹은 내가 도와야 할 거지의 모습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병들어 있는 모습으로 우리가 뵐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소경이 되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면 귀먹어리가 되어  

들어도 듣지를 못할 것인즉,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면 주님은 매우 섭섭해 하십니다. 

 

마태복음 25:42에 

"내가 주릴 때에, 내가 목마를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헐벗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슬퍼하십니다.

 

주를 믿는 자라면 누구나 주님을 뵙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드리는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실제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 예수님을 뵙게 되는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라도 믿음이 없고 순종이 없다면  

소경이 되어 주님을 알지도 보지도 못하고

자기의 거짓 설교로 자기도 속고,  

평생을 다른 사람을 속이는 설교를 했던 죄를 엄하게 심문을 받을 것이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도 믿지 못하는 설교, 자기도 행하지도 않고 전했던 설교는 한마디로 

밥벌어 먹기 위한 설교요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도 선생된 자들의 심판이 더 엄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은  

수많은 어린양들을 끌어다가 죽여 번제를 드리고,  

속죄 제사를 드리는 그 와중에서도 그 어린양의 실체인

하나님의 어린양을 자기들 손으로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그것은 믿음이 없었음이요,  

믿음 없이 애매한 양들만 희생을 시킨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소경이 되고, 귀먹어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눈으로 보고 그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따르지 아니할 뿐아니라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년대를 초월하고 상황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000녀년 전의 사람이었지만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린양이신 예수님을 2000년이라는 시간대를 초월하여 

가장 가까이서 뵈었으니 믿음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소경과 귀먹어리가 되어  

동시대(同時代)에 같은 땅에서 그 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 분의 책망도 들었고, 그분과 언쟁도 했지만은 

알아보지 못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잡아 죽이던 날에도 그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유월절 어린양을 같이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평생을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죽이면서도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그냥 믿음없이 드렸고  

지금도 유대인의 대다수가 믿음없이 유월절 어린양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어린양 한마리 잡아본 일이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내셨던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알게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주는 복음을 받고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역도 지구 반대 편이고 시대도 2천년이나 편차가 나지만

그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것은 믿음 하나 때문입니다.

 

이러고 보면 믿음은 기적입니다.   

믿음은 은혜입니다.

믿음은 금보다 더 은보다 더 큰 복입니다. 

 

우리 민족은 주위에 강대국들의 외세에 눌려 압박과 설음에 살기만 했는데

하나님이 우리 같은 약소민족에게 복음의 믿음을 주셔서 세계에서 유래없는

복음의 발전을 주셔서 전국 방방곡에 교회가 차고 넘쳐나게 하셨습니다.

 

또 덤으로 경제의 복까지 주셔서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발전한 롤모델이 

되어서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이 비결을 배우러 많이 찾아 왔었습니다.

 

그런데 금보다 은보다 더 귀한 믿음을 한국 교회가 잊어 버렸습니다. 

신앙의 정상을 계속해서 올라가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귀한 믿음을 가지기 위하여

신앙의 정상을 올라가야 할 한국 교회가 이 믿음을 소흘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이 귀한 처음 믿음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믿음이 없어도 신학교만 졸업하면 목사가 되어 설교도 합니다. 

믿음이 없어도 재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장로가 되는 한국 교회 실정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그 교회의 장로님이 25년전에 직접하던 소리가 기억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장로 되려면 몇 백만원은 있어야 장로 장립을 받습니다.

그 교회가 지금은 25년전의 인프레이션을 감한한 액수가 있어야 된다고 하더군요.

 

또 어떤 분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서울의 3000명 정도 되는 교회의 장로라고 

자신을 소개하길래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그 속에는 예수님이 꿈에도 오셨다가

가신 흔적도 없는 완전히 속에는 예수 없는 불신자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잠자는 한국 교회의 현 주소가 아닌가 하니 너무도 슬픈 생각이 듭니다.

 

믿음은 없어도 재력이 있고, 믿음은 없어도 사회적인 위치만 있고, 

믿음이 없어도 외모만 번듯하면 직분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믿음을

귀히 여기지 않은 우리내 현실을 바로 보고 우리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도 1960년대 70년대는 교회에서 믿음을 귀히 여겨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고 교회의 중직을 받기도 하고, 그 믿음을 키우기 위하여 은혜를 사모하여

10리 2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은혜의 집회를 참여 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오늘날 어디에서 얼마나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교회와 성도들에게서는 기본적인 믿음을 찾아 볼 수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병원에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곱게 늙으신 할머니가  

북한 말씨를 쓰는 것을 보고 "아~ 6.25때 월남한 실향민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할머니 권사님이시죠?"하고 물으니 몇 십년전에 권사 취임을 하신 고참 권사이라

자신을 소개하고 실향민으로서 여러 군데의 교도소 방문 사역을 통해서 일하여 왔는데

지금까지 자기의 사역을 통해서 목사가 세 명이나 배출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현재는 자기 아들이 서울대 교수로 잘 산다고 묻지 않은

말까지 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사역에 걸맞는 믿음의 냄새가 좀 약하게

난다는 인상을 받아서 좀 서운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믿음의 밑바닥에서 헤메이고 있는 한국교회!

신앙의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좁은길을 가는 성도가 많지 않다는 한국교회!

믿음이 천시되어지는 풍토는 분명히 마지막 때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입니다. 

그 믿음도 신앙의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러 올라갈때에 이삭 대신에 양을 준비하셨을 것이란   

생각을 한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들을 드리는 각오의 믿음으로 실행을 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정말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시원하게 하였습니다. 

과연 믿음의 조상다운 믿음, 신앙의 정상다운 믿음이었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는 믿음이야말로 장래가 보장된 믿음입니다.

여호와 이래가 예비되어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죽었던 독자 아들을 다시 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죽은자도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온전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  

이 신앙의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힘쓰고 애쓰는 노력이 정말 요구되고

이것이 신랑 예수를 맞이하는 가장 아름다운 신부 단장이 될 것입니다. 아멘!

    

지금까지의 말씀은 성령님이 주신 깨달음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령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마지막 부흥 진형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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