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4. 08:43ㆍ성경 이야기
어떻게 죄를 극복할 것인가? - 찰스 피니
저는 사역자로 살아 온 기간 내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나 육신, 혹은 죄의 굴레
아래서 가련한 처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도 바울이 단호하게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이 머물러야 할 올바른 상태가 아닙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 (롬 6:14)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 로마서 7장에 기록된 굴레 (즉 죄짓고 회개하고 다시 타락하는 과정)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슬프게 하는 진실 중의 하나는 많은 사역자들과 지도적 위치에 선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극복하는 법에 완전히 틀린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은 입에 담기도 뭣하지만,
아무튼 이렇습니다.
"죄들을 세세하게 따져서, 그것들을 멀리하기로 결심하고, 그것들을 대항해 싸우십시오. 필요하다면
그 죄들을 극복할 수 있을 때까지 금식 기도를 하십시오. 죄에 다시 빠져드는 일이 없도록 의지를
굳게 하십시오. 기도하고 애쓴다면 다시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이 습관으로 굳어지고
죄악된 습관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이 태도를 유지하십시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항상 몇 마디를 덧붙이기 마련입니다.
"이 싸움을 계속 싸우다 보면 당신은 분명 스스로의 힘보다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강단이나 기독교 출판물들에서 가르쳐지는 내용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화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이루어진다.' 입니다.
찰머스(Chalmers) 박사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되지만,
성화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란 주장을 계속합니다.
24년 전이던가, 뉴 잉글랜드의 저명한 신학 교수 한 명도 그와 같은 교리를 가르쳤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앗을 무렵이었습니다. 에드워드 학장이
내놓은 [질의에 관한 응답들]중 하나 때문에 저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뻔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혹자가 어떤 죄에 빠지게 되면, 그는 이것을 철저하게 파헤쳐서 이 죄가 시작된
근원지를 찾고 이것을 소멸시킬 때까지 대항해서 싸우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죄의 행위와, 이 죄의 근원 혹은 원인에 주목하자는 주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굳게 결심을 하고 죄를 대항해 싸우는 것은 죄와 죄의 근원에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죄 문제를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다른 곳으로 떨어뜨려 놓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노력들이란 결국은 쓸데없는 것이 될 것이고,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뿐입니다.
첫째로, 그런 노력들이란 죄를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게 하고, 죄를 피하는
실질적인 방법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그런 방법을 쓰면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습관은 극복하거나 피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진정한 죄의 구성 요소는 건드리지도 않은채 가만히 놓아두는 결과를 낳습니다. 죄는
외면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입니다.
죄는 단순히 육신이 저지르는 어떤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단순히 외부적 행위만을
가지고 정의내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의식적인 감동이나 욕망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죄라는 것은 마음의 결정에 따라 자아를 기쁘게 하는데 전념하거나, 궁극적으로 그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마음 상태 위에서 생겨나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행동이나 신념, 행위의 목적들,
그리고 죄가 흔히 시작되는 곳이라 불리우는 모든 것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습관으로 죄악된 습관을 압도하는
노력과 결단을 대신할 만한 대안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10).
그러나 사랑은 무슨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굳게 다짐한다고 이기심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기심의 표현이나 그 징후같은 것들을 억제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 혹은 저것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기도하면서 그것들과 투쟁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계명들에 문자 그대로 복종하고 계명을 실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은 결심을 한다고 해서 마음 속에서 이기심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뚝심이나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영안에서 복종하려는 노력,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만큼의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 노력은 다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죄는 욕망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그 욕망들을 뚝심이나 굳은 결의로 억제할 수 있겠습까?
어떤 욕망은 뚝심이나 결심으로 어느 정도는 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더 나아가서
외형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은 결과가 아닙니다.
순종은 바로 사랑에서 나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거나 감옥에 스스로를 감금시키면, 그래서 우리의 모든 욕망과
애욕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면, 우리는 몇 가지 형태의 죄들을 멀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구성하고 있는 죄의 뿌리는 어림도 없습니다. 굳은 결심은 사랑을 지켜주는
보루가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순종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에서, 뚝심과 결심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죄와의 싸움이 닿는
종착점은 그저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뚝심과 결심으로 싸우는 욕망과의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외부의
삶이나 내부의 욕망과의 싸움에서 우연히 죄를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결국은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뚝심이나 결심으로 사랑을 일으킬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노력은 다 무익한 것입니다.
비성경적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쓸데없는 노력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의 믿음으로 죄를 극복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고전 1:30),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요14:6),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셨느니라" (행 15:9).
그리고 사도행전 26:18에서도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의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32에서는,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구하였기 때문에 의를 얻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며 또한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와서 거룩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갈 5:6). 사랑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며, 또 유지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믿음으로 세상과 육신, 그리고 마귀를 이겨야 합니다.
"악한 자의 모든 불붙은 화살을 끌 수 있을 것"(엡 6:16)도 믿음을 통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은 것도 (갈 3:27), "그 행위와 함께 옛 사람을 벗어"(골 3:9)버리는 것도
믿음을 통해서 입니다. "선한 싸움"(딤전 6:12)도 믿음으로 싸우는 것이지
굳은 결심을 가지고 될 일이 아닙니다.
굳게 서는 것도 믿음을 통해서이며(고후1:24), 의지로는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요일 5:4). 육신을 복종시키고
세속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도 믿음을 통하여 입니다.
"이는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분의 선한 기쁘심에 따라 뜻을 두고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빌 2:13).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고,
또한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롬 5:5).
죄를 이기는 승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의 믿음을 통하여 옵니다. 죄를 대항해 싸운답시고
그리스도로부터 돌이킬 때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건 간에, 우리는 우리
뚝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상태로 돌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움을 거부하고서 혼란스러운
상태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과 생명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뢰할 것은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또 영원히 역사하시는 구원의 능력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 진리를 간과한 채로 성경을 가르칠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자기 의와 자기 신뢰가 깊히 뿌리박혀 있습니다.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거쳐야 할 가장 힘든 수업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문을 열기만 한다면 그분은 우리 속에 들어 오셔서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거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넘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우리의 혼을 그분과 조화시키고, 이런 식으로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애정, 욕망, 기호 그리고 열정 따위들을 적절하게 통제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기도회나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해서, 강단이나 여러 서적들을 통해서 듣게 되는 내용 중에는
우리를 그릇되게 인도하는 가르침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치 제가 앞서 말한 내용들을 따르면 견디기 너무 힘든, 고역스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인식시키곤 합니다.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이 낳는 결과란 혼란과 낙심 그리고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를 실제적인 측면에서 거부하는 것 등입니다.
그리고 간혹 제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나서는, 그런식으로 하면 수동적인 상태로 남게 될 뿐이라며
저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우리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고, 또한 새로운 힘을 제공받는 등의
선한 영향력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믿음을 통하여 모든 부분에서 그분의 거룩케 하시는 능력을 맛보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분이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 그 믿음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의 내면을 온전히 사랑으로
순종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극복하는 유일하며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따라 뜻을 두고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혐오하는 가르침도 이러한 격려의 일환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전혀 아닙니다. 빌립보서 2:12~13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분의 선한 기쁘심에 따라 뜻을 두고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빌 2:12~13).
본문에는 뚝심이나 결심으로 행하라는 격려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분을 통하여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한때는 직접 대면해서 가르치다가 지금은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인간의 나약한 의지가 아니라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바로 빌립보서 2장의 주제입니다.
바울은 너무나 자주 교회에게 가르치기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성화의
근본이시며, 그분의 영향력은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의 뚝심이나 노력으로 죄악된 습관을 억누름으로 성화를
이루려는 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적인 삶이란,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원 줄기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아 살아가듯이,
믿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발 그 의지의 종교 따위는 멀리 치워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없는 상태에서
삶을 거룩하게 꾸며 보려는 노력은 제발 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를 똑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분을 신뢰할 때만이 우리의 자아와 그분의 마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성화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 찰스 피니 -
글쓴이: 낮아진 하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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