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

2013. 1. 8. 16:56성경 이야기





요한 계시록의 처음 세 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도 요한의 놀라운 환상 중에, 그는 예수님이 신약에 나와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걷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눈은 불꽃이며,

그 분은 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러한 교회들을

의로 심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한다” 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일곱 교회 가운데 나타나시므로,

그 분은 그가 보시는 선과 악에 따라 교회들을 심판하시기 시작합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심판은

붉은 색의 글자들로 써 있는데,

이것은 모든 말이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직접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이 일곱 교회들은 실제로

현재의 에베소, 서머나, 라오디게아, 등등 에 있었던 실제 회중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은 단지 이 특정한 교회들만을 향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의 교회들을 향한, 즉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바라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듣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찬양하는 교회들에 대해

많은 좋은 것들을 열거하시면서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좋은 일들로 각 교회들을 칭찬하시지만

또한 자신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여러 가지들을 보시고

각 교회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 째 메시지는

사도 바울의 경건한 가르침 위에 세워진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은,


“너희가 첫 사랑을 져 버렸다” (계시록 2”4)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첫 사랑’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덜 성숙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독점적인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한 때 너의 마음의 제일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

그러나 지금 너는 나를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잃어버렸다.

너는 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허락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일곱 교회들에게 지적했던 모든 죄들,

즉 간음, 탐욕, 미지근함, 가짜 가르침, 이세벨적인 권위,

죽은 예배, 영적 소경의 죄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첫 번째 죄가 그 분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투하는 연인이시며

그 분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 앞에 그 어떤 것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습니까?

당신의 영혼이 예수를 갈망하고 있나요?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인가요?


우리 우편 수신자 명단에 있는 한 여자 분이

이러한 우울한 글을 썼습니다,

"저의 남편은 한 때 하나님을 향해 불타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을 그는 주님의 일에 신실하게 자신을 드렸었는데

지금은 그는 어떤 새로운 추구하는 것으로 온통 미쳐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주님을 위한 시간을 갖지 않아요.

그가 점점 냉담해져 가서 걱정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정당한 추구함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한 부자가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모든 친구들을 초청하고자 그의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람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변명하기 시작했다”(누가복음 14:18)고 말씀합니다.

한 친구는 종에게”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네.

그러니 너의 주인에게 가서 내가 갈 수 없다고 말해주게.”


그 다음 친구는 말하기를, “내가 소 다섯겨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해 볼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 갈 수 없다고 주인에게 말하라,

왜냐하면 소를 데리고 밭에 가야 하거든.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장가를 들어서 신혼여행을 가려는 참이야

그러니 잔치에 갈 시간이 없네.”


이 사람은 자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모든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그 친구들의 안락함과 편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식탁은 차려졌고 모든 것들이 준비가 되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저 너무 바쁘거나 다른데 정신이 몰두되어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오지 못한 데에는 선한, 합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친구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파티에 가거나 술집을 여기저기 기웃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반대로 이 사람들이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추천합니다.


즉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사람들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고

대량 구입한 것을 시험하는 것은 정상적인 비즈니스 관행입니다.

마지막으로 결혼은 성경이 격려하고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대로와 산간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 하노니, 전에 초대되었던 그 사람들은

아무도 내 저녁을 맛보지 못하리라” (누가 복음 14:23-24).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논지를 아주 분명히 하십니다.

즉 이러한 좋고 정당한 것들의 하나하나가

주님보다 우선권을 차지할 때에는 악한 것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종류의 방해와 요구를 겪으면서도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그런 당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는

십 분도 보내지 않는다면, 당신의 사랑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어떤 누구보다도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무의미해지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연애 시절에

당신의 배우자를 처음 사랑했던 것과 같지 않나요?

만일 그녀가 당신이 바쁜 중에 전화를 했다면

당신은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중단했지요.


만일 누군가가 당신의 단둘이 만의 시간을 끼어들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당신 둘만의 사랑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차 순위로 밀려났고요.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과의 질적인 시간을 보내지 않고도

몇 주, 혹은 몇 달을 지냅니다.


그들이 여러 날 동안을 주님을 등한시 하면서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가서에 보면, 신부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

“…가 물러나 가버렸다….” (아가서 5:6)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 밤 중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내 혼은 낙망하였도다……

내가 그를 찾았으나 발견 할 수 없었고, 내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내게 응답하지 않았도다’ (6절).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급히 거리로 달려 나아가 외칩니다,


“내 사랑하는 자를 보았습니까?”

어째서 이 일이 그녀에게 그토록 심각한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이며 이는 나의 친구라” (16절).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다” (8절) 라고 말했듯이

그녀는 그 사랑하는 자 없이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들,

즉 친구들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우리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실까요? 성경은 우리를 그의 신부,

그의 사랑하는 자, 그의 최고의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창조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보다 다른 것들을 중히 여긴다면

주님께서는 어떠한 소외감을 느끼시겠습니까?


-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출처: 주님오시는 발자국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