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정상 모리아 산을 향하여 …이삭의 두려움

2013. 4. 8. 11:06성경 이야기


 

 

저도 며칠전 이 성경구절을 읽다가 이삭이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22:7) 라고 아버지 

아브라함에 묻는 장면을 보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는데 진형곤 목사님이 같은 말씀을 

올리셔서 퍼왔습니다. 아브라함이야 신앙적으로 장성했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보겠지만(물론 이도 인간적으로는 쉽지

 않겠지만) 어린 이삭 입장에서는 얼마나 두렵고 황당했을까요? 믿었고 사랑했던 아버지가

 칼로 자기를 죽이려고 하다니요?


바로 이삭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시고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구약의 모든 중요한 인물들과 사건의 중심인물은 예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주의 

중심이고 만물의 근원이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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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정상 모리아 산을 향하여 …

창세기 22:1~2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네팔에 있는 히말리아 산맥 가운데서도  

에베르트 산으로서 기 높이가 무려 8848m나 되는데,  

이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성공을 못하다가  

1953년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합동 등반대가  

처음으로 세계의 정상을 정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80년에야 비로소  

에베르트 산의 정상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산악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가장 높은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데 

정상을 정복하면 올림픽처럼 금메달을 주는 것도 아니고  

때돈이 벌려지는 것도 아닌데 계속하여 정상을 향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정상 정복의 인간 본능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정상 정복의 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정상은 어디일까?  

성경에서 보니 그곳은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산입니다.

 

모리아산은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과 순종이 없이는  

절대 오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그 모리아 산의 정상을 정복한 사람은  

BC.1500년의 아람 사람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의 높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고 서적을 뒤져 보았지만 

산 높이가 나와 있지 않았고,  

이스라엘에서 제일 높은 산은 헬몬산과 갈멜산 정도이고 

성경에서 유명한 호렙산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으며  

헬몬산과 갈멜산은 한라산보다도 낮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야산에 불과한  

높지 않은 모리아산이 왜 신앙의 정상인고 하면  

그 모리아 산은 믿음, 곧 신앙이 없으면  

오를 수 없는 최고의 악산(惡山)이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에서 모리아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신앙의 정상이 되었는가?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생자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던 곳으로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의 속죄 제물로 드려질 것을  

예표로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신앙의 정상에 올라갔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높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기왕에 믿는 예수님을  

오늘보다 더 좋은 믿음으로 믿기를 원하는 것은 

신앙의 정상을 향해가고 싶다는 소원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도  

신앙의 정상을 향하는 마음이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 신앙의 정상에 올라야 비로소 

주님의 온전한 신부로 준비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정복했던 신앙의 정상인  

모리아산을 지금부터 같이 동반합시다.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오늘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불레셋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당신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분이 좋고 어깨가 으쓱할까 생각이 됩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보다  

세상 사람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더 좋고,  

그것도 별볼일 없는 사람이나 또 선거철에 찾아오는 것보다 

떵떵거리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같다"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인데  

아브라함이 이런 소리를 들은 후에란 뜻입니다. 

 

이런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험이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되는데

먼저는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이다.  

이는 사람을 타락시켜서 무너지게 할 목적으로  

오는 시험이니 이런 시험은 유혹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는데,  

이는 더 큰 그릇을 만드시고 더 귀하게 사용을  

하시려는 목적으로 주어지는 시험이니 테스트의 성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신 것은  

물어보나마나 더 크고 귀한 그릇으로 쓰시려고 하신 것이니  

곧 인류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사람을 넘어뜨릴 목적으로 사람을 결코 시험하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요, 은혜의 하나님이시요,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험과 고난과 연단을 통하여  

사랑하시는 자를 훈련을 시키십니다. 

 

이 세상에서도 한 단계를 더 올라가자면  

반드시 시험을 치루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통찮은 곳은 시험도 없지만  

괜찮은 곳에는 혹독한 시험을 반드시 치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시험에 합격했을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사람처럼 몰랐다가 알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 곧 그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사는 일도 굉장한 일이어서  

인정을 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으려고 정말 애를 쓰고 충성을 합니다. 

 

그런데 항차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이 얼마나 큰 복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시험이란 것은  

인정을 받게 되는 필수과정이니  

시험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 인생에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연도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시험을 건설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결국은 광명한 대로가 열리는 법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거 그를 번제로 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도 보고 있고, 

아브라함의 입장도 편한 마음으로 보고 있지만  

당시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떠한 심정이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시험 시려고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을 하시려고 말씀하시려는 것을  

꿈에도 짐작을 못한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중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편한 마음으로  

"아하, 시험이구나!, 이럴때는 이렇게 답안지를 써야지~"  

하고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눈앞의 답답한 현실만이 보일 뿐,

고난을 당할 때에는 평소 남의 일은 그렇게도 잘보여서  

장기 훈수를 두듯이 여유있게 말을 잘 하다가도

막상 내 앞에 일이 닥치면 당황하기 쉬운 것이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을 해야 되는 줄을 알았지 

"이것은 하나의 테스트일 뿐이야"하는  

여유있는 마음은 전혀 갖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삭을 묶어놓고 칼로 찌르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중지를 시켜주실거야!" 

라는 계산속을 가진 것이 전혀 아니었을 것입니다.

 

브라함이 받은 시험 문제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시험 과목을 확실히 정하셨으니,  

시험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하나님이 왜 강조를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인간적인 희망이 다 사라진 상태에 있다가  

100세에 아들을 얻었으니 그 아들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하게 생각 되었을까!  

우리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이 육십이 넘은 나 역시  

외손주들이 그렇게 이쁘고 사랑스러울 수 없는데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겠다는 인간적인 희망을 버리고 살다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으로 손자도 아니고  

"아빠"라고 부르는 그 아들을 얻었으니  

정말 기막히게 좋았을 것으로 미루어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인간인지라  

온 신경은 독생자 이삭에게 쏠려 있을 것은  

더 설명을 하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신경 세포를 만드시고 조직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과 생각을 다 아시고

아브라함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지금 시험 문제를 치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비나, 어미나, 아들이나, 딸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 모든 것을 포함한 말인데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겠으며,  

이러한 시험에 합격할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내가 하찮케 여기는 것들을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면  

얼마든지 쉽게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귀중히 여기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 내 생명을 요구하시면  

드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내 놓아라,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내놓으라면  

과연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것도 아브라함처럼 100세는 아니어도  

늙그막에 얻은 아들을 내 놓으라면  

과연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서울에서 개척하여 대교회로 부흥된  

어느 목사님이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젊었을 때 개척교회 목회를 하면서  

부부 싸움을 날이면 날마다 허구한날 싸웠다고 합니다. 

 

하루는 아들이 머리 아프다고 하더니  

일순간에 죽어가므로 아이를 붙잡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어

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겼지만 이미 숨을 거둔 후 였습니다. 

 

그런데 더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던 것은  

아들을 죽인 살인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고 

경찰이 조사하는 가운데  

"이제부터 살인혐의 피의자에게 말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이 자식, 저 자식 하면서 너희들이 부부 싸움을 하다가  

던져서 죽였지 않으냐?고 하며 자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의사의 신고로 살인혐의를 받게 된 것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의사는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것도 슬픈데,  

그 자식을 죽인 살인 피의자로 몰려서 경찰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는 밑바닥 인생으로 떨어지면서  

회개하고,변화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교회의 큰 부흥을 주시고,  

한국의 목사들을 몇천명씩 모아놓고 전국을 돌면서 세미나를  

하는 현재의 위치로 하나님이 높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젊었을 적 잃어버린 그 아들이  

지금도 생각이 나고 마음이 아파서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목회성공 다 가져가고  

그 아들을 다시 주신다면 좋겠다고 마음 아파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명하다는 그 목사님의 마음에  

지금의 목회성공을 다 가져가고 아들을 다시 주신다면

자기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아들을 택하겠다고 고백을 하는데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처럼  

"네 사랑하는 독자를 내놓아라" 하시는 시험을 받는다면  

"네,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 교회의 목사라고 해서  

다 신앙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합당치 않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의 수준에 맞게 치루게 되는  

그 모든 시험에서 탈락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도  

25년 동안이나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 뒤를 졸졸졸 따라왔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서 딱히 어디로 갈바를 몰랐지만  

일단 떠나면 길이 열리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까지 왔을때,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만 받았지  

땅 한 평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말씀을 제일주의로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도 많고 흠도 많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제일로 여기며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얻고 난 다음부터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의 시선이 하나님에게서 

독생자 이삭에게로 기울어지는듯이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지를 확인시키시려고  

시험대에 세우신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삽니다. 

나의 자식은 하나님이 내 자식을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내가 더 사랑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식의 영혼보다 더  

육체만을 사랑하는 경우가 많아서  

잠시 내 뜻대로 내 감정대로 자식을 징계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실려고 징계하시는 것이니 

사랑의 차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을 하나님께 맡기기보다는  

내가 해볼려고 몸부림을 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그래서 확실한 시험을 거쳐봐야  

나의 신앙의 정도가 확연히 드러나고 

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여부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하나님은 왜 그 곳에서 당장 하게 하지 않으시고  

거기(브에세바)에서 3일길이나 떨어진

지금의 예루살렘인 모리아땅으로 가라고 했을까요? 

 

사람은 당장 순간적인 결심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기가 쉽기도 합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많아짐으로  

결국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장례식이 보통 3일장으로 치루게 된 유래도  

3일은 지나보아야 죽음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도

그 중에 하나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순간적인 기분으로 하기보다는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인격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바라셨던 것입니다.

 

순간적인 기분은 사흘길을 가는 동안 열번이고 변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은 온전한 마음으로 결심을 못하고 무너지는 것으로서

순간적인 기분은 아무리 길길이 날고 뛰어도 작심삼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것은  

순간적인 기분이 아니라  

온 인격, 온 정신, 온 믿음, 온 사랑함으로

시작을 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진정한 순종의 모습을 보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3일길을 선택하신 것은  

인간의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살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와~ 내가 내 자식을 밧줄로 묶고, 칼로 숨통을 끊으라구요?" 

 

번제는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제입니다. 

양을 잡아서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시험지를 받아들었을 때의  

얼굴 표정이나 그의 심정을 성경은 한줄도 기록해 놓지 않았지만  

사람의 오장육보는 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성(理性)적으로 생각을 했더라면  

도무지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없었겠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들이 설령 죽게 되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은 것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신앙의 정상을 향하여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오늘도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올랐던 신앙의 정상을 향하여 

전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계속>

                     

- 마지막 부흥 진형곤 목사

 

 

출처: 주님오시는 발자국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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