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을 수가 없다!

2013. 4. 23. 13:19성경 이야기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을 수가 없다!

 

아프리카 선교사 조나단 리빙스턴이 선교목적의 밀림 탐험을 할때  

맹수에게 공격을 당하여 죽을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옆에 있던 사람이  

"선생님, 돌아가시는 줄 알았죠?"라고 말했더니 

그 때 리빙스턴이 말하기를

"아니다. 사명(使者)이 있는 자는 그것이 끝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리빙스턴이 했던 말이 오늘날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해진 것은 

그의 말재주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보증을 해주는 진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사명을 가진 자는 죽지 않는단 말인가? 

 

요한복음 2:19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파격적인 말씀을 먼저 들어보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래어 말하기를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그러나 주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 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주님은 마태복음 24:36에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고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을 때에 성전까지 포함된 말씀이셨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AD70년경에  

로마의 티토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지고 말았는데,  

외적으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죄 때문에 무너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실상은 헤롯이 46년에 걸쳐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 운명이 다했기 때문이었다. 

곧 사명이 끝났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왜냐?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진정한 성전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이었다. 

 

성전의 실상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몸을 제물로 드려 인간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니,

참 성전되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했던 성전이나  

그 안에서 드려졌던 짐승의 피흘리는 제사가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된것이었다.

 

구약의 성전의 사명은 참 성전이 되신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였으니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므로 유대인들의 거역하는

죄의 징벌을 받을 때 같이 폐기 처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며칠 전에 11살짜리 13살짜리 손주들이 와서  

가정 예배를 드릴려니까 묻는다. 

"할아버지, 왜 지금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지 않아요?"

 

그래서 구약의 성전은 사명이 끝나므로  

무너지고 참 성전되신 주님이 오셨으므로 

이제는 예수 이름 하나면 건물 성전도 필요 없고,  

양같은 제물도 필요 없다는 것을 자세히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 준적이 있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이 문제가 늘 마음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사십육 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하나  

참 성전이 아닌 이상 무너져야 한다.  

 

사명이 끝이 났으므로 사십육 년에 걸쳐 지었어도  

사명이 다한 것은 무너져야 하고 

또 반대로 만일에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성전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건재하였을 것이다.

 

물론 솔로몬의 성전은 유대인의 거역한 죄로 인하여 무너졌지만  

사명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바벨론 포로 이후에 다시 재건이 된 것이다. 

 

지구상의 성전은 그 사명이 끝이 났기 때문에  

앞으로 제3성전을 예루살렘에 지으려는 유대인들의 수고는 쓸데없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은 주님과 성령님을 모신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요,  

건물 성전의 사명은 끝이 났는데  

그런데 오늘의 예배당을 성전으로 말하는 교회가 한국에 너무 많다.

 

교회당 부속 건물이 많은 교회는 무슨 성전, 어디 성전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과거 우리나라의 ‘60년대 ’70년대에는 성전이라는 표현보다는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많이 쓰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성전이 되었고 목사는 제사장이 되었다. 

 

물론 구별된 거룩한 집이라는 의미에서  

성전(聖殿)이라고 붙이는 이름인줄 알지만 

나도 목사 이지만 그래도 목사의 제사장직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목사는  

성도들의 십일조를 자기 것으로 구별하여 쓴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성전이 무너졌으므로 무엇이든지 사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절대로 무너지거나 죽지 않는 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는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얘기를 해본다.

 

1260일 동안 두 증인이 예언을 하는 사명을 받았을때,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들을 삼켜 버리고  

누구든지 그들을 해롭게 하려 하면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한다.

 

그들은 사명을 가지고 권능으로 하늘을 닫아 비오지 못하게 하고,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하나, 누구든지 그들을 죽이지도 해하지도 못한 것은  

사명을 수행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일으킨 전쟁에서  

두 증인이 결국 죽게 되는 것은 사명의 기간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두 증인도 엄청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은 사명 때문에 살아왔고

그들이 존귀 했지만 사명이 끝나니까 그 인생도 끝이 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에서 그 사명을 빼 버리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명자는 죽음에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다.

 

사도행전 21장에보면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의 수족을 잡아 매면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이 같이 결박하여 이방인들에게 넘긴다는 예언을 할 때에,

바울을 아끼는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들 마다 울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으니 이에 바울이 하는 말을 들어 보라!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3차 세계 전도 여행중에 바울은  

주께로부터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을 받았는데,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은 로마전도 이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배짱(믿음)이 바울을 더 담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복음 전도 사명 때문에 죽기를 각오한 것이  

바울을 담대한 용사로 만들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당시의 세계의 도시 로마에도 가고  

서바나(스페인)에 가는 원대한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14일간이나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는 유라굴로 광풍에도  

두려움이 없이 죄수의 몸으로 지키는 자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음식을 먹으라고 위로하였던 모습을 보면  

진정한 사명자의 담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사명자는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인가? 

 

본시 사명(使命)이란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사명(使命)이란 일거리를 받았다는 것과 명령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구상에서 사명(使命)이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사명을 내지 않고 만드신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심심풀이로 소일삼아 만드셨다는 것 밖에 않된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어떤 분들은 조물주가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들다가

너무 굽다보니 시커먼 흑인이 나왔고, 너무 빨리 꺼내다 보니  

설익은 백인이 나왔고, 적당하게 구워서 황인이 나왔다고 말한다.

 

사람도 물건을 만들때 반드시 목적을 두고 효과있게 쓰여지도록 잘 만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때 아무런 목적과 사명없이  

그냥 뜻없이 사람을 하나인들 만드셨겠는가!

 

사람은 만물중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신 하나님의 걸작품이므로  

목적없이 사명을 내지 않고 한 사람도 그냥 만드시지 않았다. 

 

사람마다 각각 재능대로 주신 달란트가 있고,  

그 인간의 분량대로 재능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다만 인간들이 자기 욕심에 이끌리고 자기 인생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므로 부패하여 진것이 문제이다. 

 

위의 두 증인 같은 사명자들이나, 열두 사도들이나,  

바울 사도나, 오늘날의 목사들 같은 사람들만

사명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무 잘못되고 빗나간 생각인 것이다. 

 

재능과 분량을 따라서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사명이 공평하게 주어져서 창조된 것이다. 

 

영적인 세게의 사명이 있지만 육적인 세계에도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특별히 교육자나 법관이나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사에게는  

더욱 사명감이 요구가 되는데 오늘날 이들에게서  

사명감을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사명감에서 출발하여야 하는 오늘날의 목사들에게서  

뜨거운 사명감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본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이겠는가? 

 

사명(使命)을 거대하게 생각하지 말 것이라.

여러분은 어린 자식을 두고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은 자식은 부모인 내가  

책임을 지고 길러야하는 책임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내가 받은 가정에서의 사명이라는 사실이다. 

 

자동차가 굴러갈때 부속하나만 잘못되어도 자동차는 고장이 난다.

부속품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위치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사명자라는 사실임을 잊어서는 않된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죽을 까봐 염려할것 없고

사명을 버리고 사는 자는 명 재촉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使命)을 위해서 났고,  

사명(使命) 때문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사명을 이루기까지 그 목숨을 하나님이 책임지고 보호를 해 주시는데  

사명을 버리는 것은 자기 생명을 버리는 행위이므로

"나 죽여주시요"하고 명제촉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도 쓸모없는 물건은 돈을 들여서까지  

동사무소의 허락을 받아 내다 버리는데 

사람이 자기의 사명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 끝까지 그냥 놔둘 필요가 있겠는가? 

 

사실 이 글을 쓰겠다고 얼마전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도  

사실 어떤 성도가 북한의 핵공격이 있을 것이란 말에

너무 두려워 떨므로 생각하게 되었다. 

 

기실 사명을 가졌거나 바울처럼 사명에 붙잡힌 인생은  

죽을까봐 무서워 벌벌 떠는 두려움은 없는 것은  

사명을 다하다가 죽으면 영광이요, 또 실상은 사명이 다하기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담대함이 있기에 두려움이 없다. 

 

그러니 지나친 두려움에 붙잡힌 사람을 보면  

내가 해야할 사명을 알지 못하고 

내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처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러한 마음 자세로 돌아본다면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사회에서든 

내게 주어진 사명이 다 눈에 보일 것이다. 

 

나의 사명(使命)을 붙잡고 사몀감(使命感)이 뜨거운 사람일수록  

죽을까봐 두려워 떠는 따위의 두려움은 없고,

사람과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 것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인생을 살고 있는가?

숨쉬고 있으니 걍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명 재촉하고 있는 것임을 있지 말라. 

 

사명 없이 사는 인생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알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사명이 없으면 꿈도 없고 내일도 없고 소망도 없기 때문이다.

 

- 마지막 부흥 진형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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