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 이기는 자 (9)

2013. 4. 28. 10:15성경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 이기는 자 (9)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이나 모략을 받아 나쁜 평판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알 것입니다. 우리는 증오가 사람을 죽인다고 말하는데, 그렇습니다, 증오는 정신적인 살인입니다.  

 

중상모략과 거짓말은 한 사람을 위축시키고 병들게 하며, 대단히 파괴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위신, 평판, 경력 등 많은 것들을 손상시키기도 합니다. 

 

증오의 원인은 부러움이나 질투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의 진술은 비방의 말이거나 거짓말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신의 오류를 납득시킬 방법이 없이, 오히려 반대로 진실을 말해주면 증오는 훨씬 더 심해집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증오, 중상모략, 수치와 모욕에 시달리는 것은, 심지어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많은 고통은 용감하게 견딜 수 있는 사람들도 수치를 당하게 되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인해 욕을 먹고 박해와 거짓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 6:22~23, 마 5:11~12)

 

그런데 이 기쁨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 이 기쁨을 얻고 싶지만, 우리가 증오와 수치를 받게 되면, 대개 우리 마음은 깊이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포기하거나 또는 원통하게 된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반항심이나 심지어 증오가 우리 안에 밀려들어온다.  

 

거짓말은 우리의 정의감에 위배되고, 분노가 일어나게 하며 억울한 생각과 비난 때문에 괴로워 밤에도 평안히 쉬지 못할 수 있다.  

 

모두들 너무 쉽게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생기고, 이렇게 불평한다.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 겁니까? 왜 저의 평판을 이렇게 형편없이 떨어뜨리시는 거죠? 왜 제가 이렇게 많은 증오로 고통받아야 하는 겁니까?” 그 상처가 너무 깊어서 절대 치유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나도 수치심으로 인한 상처가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이 경험은 여러 해 전에, 우리 자매회의 시작이었던 청소년 사역 부흥이 일어났을 때였다.  

 

나중에 작은 가나안이 설립되고 전 세계에서 온 방문객들을 위한 영적 센터로서의 중요성을 갖기 시작하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게 되었다. 중상모략과 증오는 같은 비율로 증가했다.  

 

나는 거짓과 비난으로 가득하고 온갖 악한 일들을 내 탓으로 돌리는 편지들을 받았고, 몇몇 저명인사들은 우리 자매회와 특히 나의 인격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 편지들은 많은 기독교 단체에 보내졌는데, 우리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면서 만약 우리와 계속 접촉을 하거나 내 서적을 전달할 시에는 보호 조치를 취하겠다고 협박했다.  

 

신자들은 내 책들을 태우도록 재촉받았고, 이런 지시사항들은 실제로 행해졌다. 공적인 집회에서 나를 반대하는 경고문이 발행되거나, 테이프에 녹음되어 그 중상모략은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고, 회개와 기도의 삶으로 이끌며,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이유로 우리를 악한 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것들이 마치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우리의 명예를 훼손하는 출판물들이 계속해서 발행되었다. 이런 것들이 헌신적인 기독교인들의 모임 내에서 번져나갔고 심지어 먼 곳에 있는 선교지까지 전달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는데, 신자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매우 깊이 상처 받았을 때,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을 보여주셨다. 먼저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주님이 하셨군요!”라는 고백이 필수적이며 특권임을 배워야 했다.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되며, 영원하며 지혜롭고 애정 어린 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 고통에는 보물이 들어 있으며, 이것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우리 마음속에 평화와 평온이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것이 당신의 손에서 오는 것이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길을 가셨다. 그는 수치와 굴욕, 모략을 당하셨으며 거짓 비난을 당해 마침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 순결하고 거룩하신 분이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분의 제자이며 그 분께 속해 있었다. 이제 나는 진리이신 주님의 편에 설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어느 정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20) 이것은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4~25)  

 

이제 나는 예수님과 더욱 깊이 결속되었다. 이제 나에게 그 성경구절을 적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이 얼마나 귀중한 선물인가! 나의 마음은 위로를 받았으며, 주님의 길에 동참하는 깊은 열정으로 나 자신을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또한 이 모욕의 길이 나를 정화시키는 주님의 계획이셨음을 보여주셨다. 원수에게 자비로운 사랑을 베푸는 대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으로부터 나를 깊이 해방시키기를 원하셨다.  

 

이 훈계의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랑이 나의 삶에 더욱 더 넘쳐나도록 내 안에서 일하기를 원하셨다. 그 분은 놀랍고 거룩한 목적을 가지시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원수들을 내 삶에 허락하셨다. 이 상처들로부터 자비로운 사랑이 흘러나왔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모략과 미움을 받으셨고 고통 당하셨다. 상처받은 주님의 마음에서는, 주님을 미워하고 비방했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향한 자비와 용서의 사랑만이 흘러나왔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하고자 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모욕당하고 부당하게 고통받을 때, 같은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 그 분은 우리 안에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을 불어넣기 원하신다.  

 

원수를 향한, 우리에게 상처를 주며 증오하고 비방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을 향한 자비로운 사랑이다. 우리의 상처로부터 쓴 뿌리가 아닌 사랑과 용서가 흘러나와야 한다.

 

나의 노력으로는 원수들을 향해 이런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비록 한 마디 방어도 없이 모든 것을 조용하게 견뎌냈지만,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어린 양의 길을 가셨다. 대속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구원을 이루셨으며, 그 분의 상처로부터 구원과 대속이 흘러나왔다. 주님의 거룩한 보혈에는 우리를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새롭게 어린양의 보혈을 구했다. 주님은 나를 어린 양으로 만드셨고, 그 결과 나는 온갖 부당함을 견딜 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예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셨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원수를 향한 자비로운 사랑을 부어주셨다.

 

나처럼, 원수를 사랑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보혈을 구할 수 있다. 예수님의 구원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살지 못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기꺼이 그들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기로 결단할 때,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 삶에 효력을 발휘한다.  

 

그럴 때 주님의 구원의 권능으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특권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어느 때보다도 깊은 평안이 나의 마음을 채우는 것을 경험했으며,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그 기쁨을 맛보았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이미 고통 중에서도 시작되며, 우리의 시선을 천국으로 향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원수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미움과 박해와 모욕과 비방을 받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우리에 대한 거짓말이 퍼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고, 영원한 사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  

 

이것은 이전에도, 지금도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는 기쁘게 주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고 있다. 이 땅에서 증오를 극복하고 사랑으로 반응한 사람들은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진리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영원한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박해와 비방을 받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기쁨과 영광을 주실 것이다.

 

현재의 고통은 잠시뿐이며, 수치와 모욕, 증오, 비방, 우리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할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 반대로, 우리가 영생에서 받게 될 것들은 영원하다. 그리고 영생은 성경에서 말씀하듯이, 이 땅에서 수모를 당하고 미움과 비방을 받은 사람들은 영광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이생에서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증오와 비방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이 사랑이 자라서 꽃필 수 있는 곳은 이 땅에서가 아니겠는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증오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면 얻을 수 없는 풍성한 축복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 

 

증오와 비방에 직면하는 것은 특별히 심한 고통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특별한 축복이 그 안에 숨어 있다. 모욕은 우리를 더 작고 낮아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던가? 예수님처럼 되어서 어느 날 그 분과 대면하여 보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증오와 비방의 화살에 맞았을 때,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복종시키고 이렇게 선포하자.  

 

“오 나의 구세주 예수님, 오 나의 아버지, 저는 이 고통을 겪기 원합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히 이 고통이 필요합니다. 모욕은 겸손케 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저를 더 낮아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헌신의 자세를 취할 때 고통의 쓰라림은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더 깊이, 더 깊이 엎드려라. 그러면 나의 은혜가 네게 임하고, 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한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주님과 가까워지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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