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013. 8. 13. 12:39성경 이야기



마태복음 11장 15-26절                                  

 

초림의 상황과 재림의 때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금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당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신성로마제국 건설’을 꿈꾸는 일루미나티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헬라어가 로마가 지배하던 나라들 가운데 공용어로 사용된 것처럼 지금은 영어가 전 세계의 공용어가 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네로 황제로부터 비롯된 모진 박해가 있었던 것처럼, 이제 조만간 교회의 휴거 사건이 있고 나면, 이 땅에 적그리스도로 인한 모진 박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교회 밖 세상의 모습 뿐 아니라, 교회 안의 모습도 2,000년 전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겁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직접 하늘로서 온 표적들을 보여주며 말씀을 전하셨지만, 저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많은 시대의 표적들과 예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시대의 표적들을 보고 경고의 말씀들을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여”(막 8:18)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실 때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5절)하신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회개함으로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이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의 사명을 감당했다(14) 하시면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직접 전하신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길 거부한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해 책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핍니다.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감각한 시대라 하십니다(16,17).

 

한 아이가 장터에서 동무들을 불러놓고 놀이를 합니다. 이 아이가 결혼식 놀이를 하자면서 흥겹게 피리를 붑니다. 피리를 불면 다른 아이들이 결혼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처럼 춤추는 흉내를 내야 하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합니다. 이에 흥미를 잃은 아이가 장례식 놀이를 하자면서 이번에는 곡하는 흉내를 냅니다. 한 아이가 곡을 하면 나머지 아이들이 가슴을 치면서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역시 반응이 없습니다.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알렸지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하신 말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구름떼같이 몰려왔던 무리들이, 영생을 얻으려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요 6:24)는 말씀을 전하자 모두 예수님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세상일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무관심한 세대였습니다.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았던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였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이 처음 전하신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였습니다. 주의 오심이 가까운 오늘날 우리가 전해야 할 최우선적인 말씀도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세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는 관심이 많지만, 영생과 천국을 얻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인 것입니다.

 

2. 비난을 즐기는 시대(18,19)라 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귀신들렸다 비난하던 저들이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는 비난을 합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던 저들이, 하찮은 문제를 가지고 책잡으려 한 것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사사로운 것으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싫어지면 밥 먹는 것도 미워 보인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의 빛 된 행실과 말씀을 통해 저들의 위선적이고 죄 된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진리’를 외면한 채 비판만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사사로운 것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터넷 사역을 하다 보니 가끔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가지고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건 이해가 되나, 도가 지나쳐서 글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댓글들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메시지나 행적에 문제가 있다면, 이에 대해선 당연히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대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상대방을 매도하고 시비를 걸어서는 안됩니다. 비판과 비난은 다른 겁니다. 건전한 비판은 필요한 것이지만, 비난은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본질이 아니라 하찮은 것으로 책잡으려는 왜곡되고 삐뚤어진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3. 완악한 시대라 하십니다(20-24).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자,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이 고을들 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십니다. 저들에게 베푼 권능을 두로와 시돈과 소돔에 베풀었다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 정도 권능을 베푸시고 말씀을 들려주었으면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베푸신 권능과 말씀이 그 시대에 주신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메시야요, 주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이러한 표적들을 보고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요, 하늘로서 온 표적을 보고도 인정치 않으려는 완악한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시대의 표적들’이 있습니다. 1900년 동안 역사 속에 사라졌던 이스라엘이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는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혼취케 하는 잔과 무거운 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이 하나하나씩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만큼 보여주셨으면 이제는 회개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겁니다. 이런 분명한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소돔 땅보다 견디기 힘든 심판이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4.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25)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과 표적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살피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주의라는 잣대,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고 말씀을 들었기에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늘의 진리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의 예언들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부분의 경우 신학적인 편견을 가지고 살피기에 어렵게 보이는 겁니다. 신학적인 편견을 버리고 어린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살피면 오히려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한국 교회 안에는 rfid 칩이 짐승의 표냐 아니냐로 논쟁이 되고 있는데, 짐승의 표를 자꾸 ‘상징’으로 해석하려 하기에 이런 논쟁이 생기는 겁니다.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라는 편견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을 상징으로 해석하다 보니, ‘짐승의 표’도 상징으로 해석하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6절에 등장하는 ‘표’에 해당하는 헬라어 χαραγμα(카라그마)는 짐승이나 노예에게 찍는 낙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17절에 보면 이 표를 받지 않는 자는 매매를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씀을 통해 보면 이 표가 일종의 전자화폐, 크레디트 카드의 기능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살피면 ‘짐승의 표’가 상징이 아니라 장차 짐승으로 상징되는 적그리스도가 나라를 세우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제의 수단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장된 신용정보와 GPS를 통해 현금을 대신하고, 오른손이나 이마에 이것을 이식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할 수 있는 rfid 칩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묘사하고 있는 짐승의 표가 될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어린 아이들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한 마음으로 보기에 오히려 볼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오히려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감각하고 완악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시대의 징조를 보아야 합니다. 보아야 깨달을 수 있고, 깨달아야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이 세대 가운데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전에 / 에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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