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까?

2014. 1. 14. 22:45성경 이야기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까? 

데이빗 윌커슨 목사


요한 계시록의 처음 세 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도 요한의 놀라운 환상 중에,

그는 예수님이 신약에 나와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걷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눈은 불꽃이며, 그 분은 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러한 교회들을 의로 심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 전서 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한다” 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일곱 교회 가운데 나타나시므로, 그 분은 그가 보시는 선과 악에 따라

교회들을 심판하시기 시작합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심판은 붉은 색의 글자들로 써 있는데,

이것은 모든 말이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직접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이 일곱 교회들은 실제로 현재의 에베소, 서머나, 라오디게아, 등등 에 있었던

실제 회중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은 단지 이 특정한 교회들만을 향해서가

아니라 저 세계의 교회들을 향한, 즉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바라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듣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찬양하는 교회들에 대해 많은 좋은 것들을 열거 하시면서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좋은 일들로 각 교회들을 칭찬하시지만 또한 자신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여러 가지들을 보시고 각 교회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 째 메시지는 사도 바울의 경건한 가르침 위에 세워진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은,

“너희가 첫 사랑을 져 버렸다” (계시록 2”4)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첫 사랑’ 이라는 단어를 사용 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덜 성숙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독점적인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한 때 너의 마음의 제일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 그러나 지금 너는 나를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잃어버렸다. 너는 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허락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일곱 교회들에게 지적했던 모든 죄들, 즉 간음, 탐욕, 미지근함,

가짜 가르침, 이세벨적인 권위, 죽은 예배, 영적 소경의 죄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첫 번째 죄가 그 분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투하는 연인이시며 그 분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 앞에 그 어떤 것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습니까?

당신의 영혼이 예수를 갈망하고 있나요,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인가요?


우리 우편 수신자 명단에 있는 한 여자 분이 이러한 우울한 글을 썼습니다,

"저의 남편은 한 때 하나님을 향해 불타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을 그는 주님의 일에 신실하게 자신을 드렸었는데 지금은 그는 어떤 새로운

추구하는 것으로 온통 미쳐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주님을 위한 시간을 갖지 않아요.

그가 점점 냉담해져가서 걱정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정당한 추구함에 관한 비유를 말씀 해 주었습니다.

한 부자가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모든 친구들을 초청하고자 그의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람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변명하기 시작했다”(누가복음 14:18)고 말씀합니다. 한 친구는 종에게”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네. 그러니 너의 주인에게 가서 내가 갈 수 없다고 말해 주게.” 


그 다음 친구는 말하기를, “내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해 볼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 갈 수 없다고 주인에게 말하라, 왜냐하면 소를 데리고 밭에

가야 하거든.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장가를 들어서 신혼 여행을 가려는 참이야 그러니

잔치에 갈 시간이 없네.” 이 사람은 자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모든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그 친구들의 안락함과 편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식탁은 차려졌고 모든 것들이 준비가 되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저 너무 바쁘거나 다른데 정신이 몰두되어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오지 못한 데에는 선한, 합법적이 이유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친구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파티에 가거나 술집을

여기 저기 기웃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반대로 이 사람들이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추천합니다. 즉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은

사람들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 해줄 수 있고 대량 구입한 것을 시험하는 것은 정상적인

비즈니스 관행입니다. 마지막으로 결혼은 성경이 격려하고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대로와 산간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 하노니, 전에 초대되었던 그 사람들은 아무도 내 저녁을

맛보지 못하리라” (누가 복음 14:23-24).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논지를 아주 분명히 하십니다.

즉 이러한 좋고 정당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주님보다 우선권을 차지 할 때에는 악한 것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종류의 방해와 요구를 겪으면서도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그런 당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는 십 분도 보내지 않는다면, 당신의 사랑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어떤 누구보다도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무의미해지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연애 시절에 당신의 배우자를 처음 사랑했던 것과 같지 않나요?

만일 그녀가 당신이 바쁜 중에 전화를 했다면 당신은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중단 했지요. 만일 누군가가 당신의 단둘이 만의 시간을 끼어 들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당신 둘만의 사랑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차 순위로 밀려났고요. 오늘 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과의 질적인 시간을 보내지 않고도 몇 주,

혹은 몇 달을 지냅니다. 그들이 여러 날 동안을 주님을 등한시 하면서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가서에 보면, 신부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 “…가 물러나 가버렸다….” (아가서 5:6)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 밤 중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내 혼은 낙망하였도다……내가 그를 찾았으나 발견 할 수 없었고, 내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내게 응답하지 않았도다’ (6절).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급히 거리로 달려

나아가 외칩니다, “내 사랑하는 자를 보았습니까?”


어째서 이 일이 그녀에게 그토록 심각한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이며 이는 나의 친구라” (16절).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다” (8절) 라고 말했듯이 그녀는 그 사랑하는 자 없이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들, 즉 친구들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우리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실까요? 성경은 우리를 그의 신부, 그의 사랑하는 자,

그의 최고의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창조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보다 다른 것들을 중히 여긴다면 주님께서는 어떠한

거절감을 느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