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 - 영접하는 자

2014. 1. 27. 21:38성경 이야기



요한복음 1장 1-14절                                            

 

요한계시록이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라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초림 사건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계시록의 말씀을 쓰기 직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먼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요 1:1,14)’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 것은 곧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육하신 말씀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육신의 사건은 2,000년 전 말씀되신 성자 하나님이 육신의 장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2,000년 전 육신의 장막을 치고 찾아오신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다시금 장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찾아오실 것입니다. 재림의 때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하루하루를 ‘마라나타’의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개한 지난 시간에 이어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4. 창조의 주(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말씀’되신 예수님은 7일간의 천지창조에 함께하셨고(창 1:3), 인간을 지으실 때도 함께하셨습니다(창 1:26).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 메시야임을 증거 하는 7가지 표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표적이 ‘가나혼인 잔치에서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표적’(요 2:1-11)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표적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표적’(요 6:1-13)입니다. 이 두 가지 표적은 모두 예수님이 만물을 지으신 창조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결례에 쓰려고 항아리에 담아놓은 평범한 물을, 물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값진 포도주로 재창조하셨습니다. 또 디베랴 광야에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 명을 먹이시는 창조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주’가 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하십니다.

 

창조주 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5. 생명(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바로 믿는 자들이 소망하는 궁극적인 구원 영생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람은 본래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지음 받은 영적인 피조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창 2:7).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음’이라는 저주와 심판이 찾아온 것입니다(창 2:17).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바로 인간들이 본래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안에 바로 이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소개된 7가지 표적 가운데 첫 번째 표적이 예수님이 창조의 주가 되심을 보여준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이라면, 마지막 표적은 바로 예수님이 ‘생명’과 ‘부활’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신(요 11:25) ‘나사로의 부활 사건’입니다. 이 기적을 일으키실 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하셨습니다.

 

예수가 곧 생명이고, 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죽어도 다시 사는 영생과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 다시 말해 영생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6. 빛(5, 9, 10)

 

“빛이 어두움에 비추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5)했습니다. 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9,10)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소개된 7가지 표적들 가운데 6번째 표적이 바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입니다(요 9:1-7).

 

우리가 사물을 보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온전한 눈이 있어야 하고, 또 빛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 아무리 멎진 풍광이 펼쳐져도 눈이 온전치 못하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비록 온전한 눈을 가지고 있어도,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눈을 밝혀 세상과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의 빛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가 그 실체를 깨닫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했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은 빛으로 인하여 어둠 속에 감추어둔 추악한 일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싫어했던 이유가 그런 겁니다. 빛 되신 주님의 행실과 교훈으로 인해, 위선적이고 탐욕스런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예수님을 미워하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겁니다.

 

빛은 어둠의 일들을 폭로합니다. 빛 되신 주님이 우리의 죄와 탐욕스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빛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자들만이 빛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마지막으로 성육하신 말씀이요, 창조자요, 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아니하였다(10, 11)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주요, 생명이요,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자신이 직접 창조하신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도 못하였고(10), 심지어 자기 백성들도 예수님을 영접지 아니하였다(11) 했습니다. ‘자기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약속된 메시야가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왕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의 길을 가게 된 것이고, 저들에게 주어졌던 제사장의 사명 즉 선교적 사명이 이방인이 중심이 된 교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롬 11장).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고 영접한 사람들은 적은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조만간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자기 백성 즉,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예비하신 처소로 데려가시기 위해 오실 겁니다. 과연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 1:11,12)하십니다. 오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될 것입니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전에/ 에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