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길을 가면서 나는 온 몸으로 울어야했단다.”

2014. 2. 2. 10:46성경 이야기

 

 

어느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위대하고 강하신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퍼즐의 한 조각으로는 누구도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퍼즐에 마지막 한 조각이 없어도 작품을 완성시킬 수 없단다.”

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우리 각자가 퍼즐의 한 조각들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퍼즐에서 한 조각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에 퍼즐이 모두 맞춰지고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 없다면

그 퍼즐의 한 조각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 각자는 힘이 없고 연약하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채

하나님의 뜻대로 퍼즐조각의 들쑥날쑥한 부분들이

서로 맞춰져가면서 하나의 그림이나 작품으로

만들어져가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남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고

나에게 없는 것이 남에게 있기에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은

없어서는 안 될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의 걸작품 중에 한 부분인

소중한 조각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데

모든 분들이 존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중보를 하는데

겨울잠을 자는 동물에 비유하시며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깊은 잠을 자고 있다고 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나라와 민족, 교회를 향한 중보를 하는데

말씀을 전하시는 주의 종들과 교사들에 대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셔츠의 단추가 처음부터 잘못 잠겼는지

하나씩 밀려나서 끝이 맞지 않고 삐뚤어져 있는

셔츠를 보게 하시면서 주의 종 한분이 깨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주의 종 한 분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깨닫지 못해서 깨어있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전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을 따라가는 수많은 양들은 같은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깨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단추를 잘 채우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주의 종 한 사람이 깨어나는 것이

너무 중요하고 또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하셨는데

주일새벽에 기도하면서 한해를 돌아보는데

"세상에 살면서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잘 살았는지?

주님을 높여드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한 사람의 예배자로 살아왔는지?

주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에 얼마나 충성했는지?"에 대한 회개를 하는데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회개를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시간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감사,감격하며 찬양을 드리는데

십자가를 지신 채 골고다 언덕을 힘겹게 오르시던 예수님께서

“내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있었다.”라고 하시며 그 길을 가셨습니다.

 

언덕위에 세워진 십자가 중앙에

예수님께서 저를 품에 꼭 안고 계시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천년 전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그 고통 중에서도 수도 없이

우리의 이름을 주님의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셨으며

끝까지 잊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저는 그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쏟아지던 보혈이

언덕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보혈이 흐르는 곳마다 쓰러져 있고 죽어가던

풀과 꽃들이 새 힘을 얻는 것처럼 다시 살아나고 있었고

그 피는 이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가슴에까지 흘러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아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찾아 흐르고 있었고

아직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는 예수님의 보혈은

영혼들을 향한 아버지의 긍휼이었습니다.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쉽지 만은 않지만

나는 정말 주님을 위해 살고 있을까?

아니면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한 번 제 자신에게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결단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제 각기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고 길을 가고 있었는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혼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컸지만 힘들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과 대화하며 즐거워하고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반면에 혼자서도 힘들지 않게

지고 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십자가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가지 않고 혼자서 가는 사람은

십자가의 크기보다 훨씬 더 힘겨워 보였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처럼 지쳐보였습니다.

 

아무리 좁은 길을 간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행복할 수 있지만

주님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그 길이 편한 길일지라도

그 자체가 재앙이고 견디기 힘든 고통스런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각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한 곳을 향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사랑하는 이들을 맞아주시려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어서 계시는 모습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데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저의 마음도 이토록 아픈데

사랑의 본체이시며 그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영혼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아픔을 어떨지...

소리내어 기도할 수조차 없었고

그저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아픈 마음을

제가 가진 작은 사랑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측량할 수도 없었지만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시자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처럼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 통곡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단 위에 있는 십자가 아래서 울고 계셨는데

“얼마나 더 참아야 할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돌아올까?

얼마나 더....”라고 하시면서

거의 절규에 가까운 통곡이었고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깊고도 오랜 아픔 때문인지

피가 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모습처럼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시면서 소리 내어 우시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을 때와 같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하며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시리아 난민촌에서 이번에 내린 폭설로

어린 아이들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3~4살 정도 되는 어린 아이가 먹을 것이 없고

제대로 추위를 견딜 수 없어서

엄마가 품에 꼭 안고 있다가

엄마는 견디다 못해서 숨진 것 같았고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 품에서 소리내어 울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주님의 아픈 마음을 부어주시면서

동시에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더 통곡하듯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지 한참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신 채

계속해서 절규하시고 또 통곡하고 계셨는데

주님은 한 영혼만이 아니라

많은 영혼들의 모습을 보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되보이는 여자 아이였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한 어린 친구를 보면서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에 살면서도

제대로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 것 때문에

믿음을 져버리는 이들의 신앙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나를 찾아주었으면....

한 번만이라도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라고 하시는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따라오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영혼이 죽어버려 자신을 위해서 울 수조차 없는 영혼들을 생각하며

지금 기도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그가 당할 환난의 고통이 생각나면서

주님의 아픔과 영혼에 대한 아픔이 더해지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는 아이들과

이 시대를 알지 못해서 깨어있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어린 생명들, 환난에 남겨질 아이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성전 바닥에 주저앉아서 미친 사람처럼

절규하고 통곡하며 온 몸으로 울고 또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날에 후회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금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보기에도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제 안에 세미하게 

“배설물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느냐?

배설물을 품에 꼭 간직하고 있는 이가 있느냐?”

고 하시는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이렇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이 보고 싶고 그립지만

우리를 더 그리워하시고 보고 싶어하시는

주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랑이 그립다.”라고 하시는데

그 한 마디가 마음 속 깊이 새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머리위로

예수님의 눈물이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은 일회용품처럼 한번 쓰고 버리는 가벼운 것이 아닌데...

원하는 것이 없어서 그것을 대신하는 대용품 같은 순간의 사랑이 아닌데....”

라고 하시는데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을

알아드리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우신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그리움이 나를 춤추게 한단다.

사랑하는 이들의 갈망은 나를 늘 설레게 하지.

사랑하는 이들의 외침(기도)은 나로 하여금

쉬지 못하게 하고 (쉬지 않고 주님이 일하시도록 한다는 말씀)

사랑하는 이들의 기다림은 내 발걸음을 재촉한단다. 일어나 함께 가자.”

라고 하시며 저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자꾸 예수님의 발이 마음에 걸렸는데

예수님께서 맨발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마음을 아셨는지 옆면이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보석들이 박혀있는 샌들처럼 생긴 가벼운 신발을 신으셨는데

제가 자꾸 마음에 걸려하는 것을 생각하시고

배려해주시는 자상함에 다시 한 번 감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간 곳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골고다 언덕길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길 앞에서 맨발로 서 계시는

예수님의 발을 보고 저도 신을 벗었는데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바라보시면서

“이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길을 가면서 나는 온 몸으로 울어야했단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셔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었는데

그 피는 곧 영혼들을 향해 온 몸으로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도로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을 걸을 때

돌과 흙 때문에 발이 따가워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처럼

맨발로 그 길을 걷는데 따갑고 아픈 것이 느껴지면서

채찍에 맞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넘어지셨을 때 군병들의 채찍에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시면서

고통이 더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찍에 맞으신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힘에 겨워 십자가를 지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지

군병이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같이 가게 하였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몰랐을 테지만 내가 그를 원했다.”라고 하시는데

구레네 시몬이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던 것은

우연도 아니었고 창세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갈 자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주님께서 시몬을 원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고

군병이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웠으며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겠지만

그것은 주님이 구레네 시몬에게 원하셨던 길이었고

그것을 위해 그는 선택받았으며 그 시대에 태어났고

그 시간에 그곳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들 각자에게도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계획이 있으며

각자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셨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그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그 길을 갔겠지만

예수님께서 가장 힘들었을 때

곁에 있어드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시몬이 부러웠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이지.”라고 하시는데

육신의 어머니를 요한사도에게 부탁하셨던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었고

먼 길을 떠나면서 소중한 것(사람)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이거나

그만큼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것은

그에게는 내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시는데

자신의 전부였던 예수님이 죽으셨으니

전부를 잃어버린 것 같았을텐데

예수님께 발라드리려고 향품을 준비해서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무덤으로 달려간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신 것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지만

오직 주님만이 전부가 되신 분들을 만나주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맨발이셨고

움막 같기도 하고 작은 동굴처럼 보이는 곳으로 가셨는데

처음에는 한 사람만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한명, 두명 사람들이 모이더니 옹기종기 모여앉아

작은 소리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핍박 지역에 있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계신 분들을 품에 안아주시는데

그분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심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곳은 뜨거운 눈물과 임재가 가득했고

울면서 주님 어서 오시라는 기도를 드리며

자유세계에 사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모습 같았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이 심하게 맞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분을 품에 안으신 채

대신 발에 짓밟히시며 맞고 계셨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불쌍한 핍박자의 눈을 열어서

볼 수 있게 해주시라는 중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늘 함께 해주시고

우리 모임에 함께 해주시라는 기도가 더 간절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늘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난한 심령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천 년 전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그 때 예수님께서 만나주셨던 사람들,

예수님께 쓰임 받았던 제자들,

지금도 예수님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이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고 평범하거나

오히려 무시당하는 낮고 천한 이들이었고

주님이 없으면 안되는 이들을 만나주신 것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며 기다리는 분들을

데리러 오실 거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 25:35~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성탄절 새벽에 주님이 원하시는 선물은 뭘까?

라고 생각하며 기도하는데

마태복음 25:35~40절 말씀과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슬피 울던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면서

이 시대 영혼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과

함께 있어드리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핍박 지역에서 예수님을 믿거나

복음을 전하다 붙잡혀서 수용소에 갇혀있는 분들,

영적으로 갇혀있는 영혼들,

영적 양식이 없어 주려죽는 영혼들,

목마른 영혼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벌거벗은 줄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들,

이런 병들고 나그네 된 자들을 생각하며 중보를 드렸습니다.

 

성탄절 날 오전에 찬양을 드리는데

하늘을 가득채운 수많은 천사들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각자 한 사람씩 대하시는데

우주 창조도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심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나를 위해,

부활하시고 다시 오심도 나를 위한 것처럼

어떤 장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각자의 마음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의 구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 구유보다

더 더럽고 초라한 내 안에 오신 예수님!

제 마음에 최고의 왕이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 마음의 보좌에 앉아계신 왕이신 예수님께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에게서보다, 어떤 곳에서보다

바로 제 마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시고

저의 사랑과 경배,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 마음 안에 왕의 자리에 앉아계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제 영혼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님! 제 안에서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의 나라가 임하며 주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제 안에서 왕이 되셔서 최고로 높임을 받아주세요.’

라고 고백이 되었습니다.

 

(시84:5~7)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셔도

제 안에서 높임을 받지 않으시면 안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왕이 되신다 해도

나의 왕이 되지 않으시면 안되듯이

주님은 모든 이들에게 높임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왕이시지만

나(우리들 각자)에게서 왕이 되지 않고 높임받지 못하신다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윗 왕을 위해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떠온 물이

그들의 생명과 같기에 먹지 못하고 주님께 쏟아버렸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까지 삼아주셨기에

얼마나 충성하고 사랑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이 다시 오신다는 소식보다 기쁜 소식은 없었습니다.

다시 오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이 시대 신부된 교회들의 사명처럼

우리 마음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이제 다시 오실 주의 길을 예비하듯이 정결함과 사랑, 사모함으로

우리 마음에 예비한 시온의 대로로 나를 만나러 오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는데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의 마음에 왕으로 좌정해 계시는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극진히 모시고 사랑하고 충성하느냐에 따라

그들을 만나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왕으로 대우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시며

대접을 받으실 수 있기를 더 갈망하며

동시에 회개도 같이 되었습니다.

 

말씀시간에 부모님 때문에

약국에서 약을 훔치다 걸린 아이에게

진통제와 야채스프를 건네주었던 것 때문인지

자신이 의사가 되어서 그 은혜를 보답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는 예화를 듣고 있는데

예전에 주일학교 집회 시간에 봤던 영상이

오버랩 되듯이 생각났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자기 방을 치우라고 하자

댓가를 요구하는 아이가 괘씸하다는 생각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그동안 엄마가 아이에게 해준 모든 일마다

돈으로 계산해서 종이에 적었고 그것을 전부 더해서

총 가격을 적었는데 그 가격은 ‘완불’이었습니다.

 

엄마를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이에게

더 큰 사랑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우리를 위해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게 해준 영상이었습니다.

 

정말 영원히 보답해도 다 보답할 수 없는 은혜이지만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며

충성하고 섬김으로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그렇게 했다고 그 날에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주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지극히 큰 상급이셨습니다.

 

악한 영과 싸우는 것이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도 허락하시고 귀신의 역사도 허락하시는데

이렇게 싸우면서 승리할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만

실패조차도 승리의 디딤판으로 사용하시는 주님!

 

그러면서 더 기도할 수밖에 없게 하시고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주님을 의지하며

능력을 구하게 하시면서 강해지고 담대하게 하시며

깨어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우리 대장되신 주님과 함께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그 날까지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영혼들을 위하여

오늘도 무릎으로 겸손히 나아갑니다.

 

 

출처 : 주님오시는 발자국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