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2014. 2. 13. 22:04성경 이야기


 

 

요한복음 1장 19-34절                                        

 

지난 시간에는 스스로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요 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라고 소개한 세례요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외롭고 거친 광야에 머물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마친 뒤에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모두 예수님께로 인도한 뒤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를 흥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는 쇠하여지는 삶을(요 3:30) 택한 것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에 대해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는 말씀으로 칭찬해주셨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은 세례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속죄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음을 증거 하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에덴동산에는 제단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로는 범죄한 인생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반드시 제단을 통해야 했습니다. 제단을 통해 속죄의 제사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속죄의 제사를 바치는 제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어린 양’인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지 않으신 것은 바로 ‘속죄의 제물’이 빠진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속죄의 의미를 담아 ‘양의 첫 새끼’(창 4:4)를 드렸지만, 가인은 ‘땅의 소산’(창 4:3)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습니다.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드린 가인의 제사는 “속죄 사역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생략한 제사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어린양’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살피면 ‘암노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4번 사용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두 번이 오늘 읽은 본문 29절과 또 36절에 나오고 있고, 또 한 번은 베드로전서 1장 19절에서 그리고 마지막 한번은 사도행전 8장 32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빌립집사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고 광야로 나갔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가진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러 갔다가 이제 병거를 타고 에디오피아로 내려가던 간다게의 내시가 빌립집사를 만났습니다. 빌립집사를 만나 자신이 읽고 있던 이사야 53장 7절에 등장하는 ‘어린 양’이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본문에서 말하는 ‘어린 양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빌립집사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에 사역을 이루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이 증거를 들은 간다게의 내시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했습니다.

 

간다게의 내시가 읽었던 이사야 53장에는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4-7).

 

바로 예수님이 속죄의 사역을 담당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 ‘암노스’가 되심을 증거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29절에서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하십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옛날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바라봄으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민수기 21장, 요 3:14), 이제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속죄의 어린양 되신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나보다 앞선 분(30)

 

누가복음 1장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서로 친족 간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눅 1:36). 그렇다면 세례요한과 예수님도 서로 먼 친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는 또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기 이미 여섯 달 전에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잉태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순서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한 순서로 따지면 세례요한이 오히려 예수님을 앞선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나보다 앞선 분”(30)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나보다 앞선 분”이라 말한 것은 먼저,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있기 전부터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대속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겁니다. 그래서 태어난 날짜와 상관없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나보다 앞선 분”이라 했던 것입니다.

 

“나보다 앞선 분”이라는 말에는 또 “나보다 뛰어난 분” 혹은 “나보다 능력이 많은 분”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물로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시는 분(33)이십니다.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세례요한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율법의 말씀으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그의 사역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을 뿐 아니라, 죄인 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그는 “나보다 뛰어난 분”이라 한 것입니다.

 

3.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대해서 “그가 나보다 앞선 분”(30)이라 소개하면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의 사역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누구든지 구하기만 하면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 즉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은혜의 시대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 겁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통해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고, 기도하면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은혜의 시대는 교회의 휴거 사건으로 갑자기 끝을 고하게 될 것이고, 이 후로 7년 대환난으로 묘사되는 심판의 시대가 찾아올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4.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마지막 증언은 “하나님의 아들”(34, 막 1:11)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심은 먼저,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세례요한보다 앞선 분이시고, 또 성자 하나님으로 창조의 사역에도 함께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이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귀의 아들’이라면 마귀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사랑의 아들’이라고 하면 사랑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 화평을 가져오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같은 속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라고 청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을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기록한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요

2. 세례요한보다 앞선 분이요

3.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요

4.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처; 이 세대가 가기전에/ 예레미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