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 - 세상의 빛

2014. 4. 10. 20:36성경 이야기



요한복음 12 - 세상의 빛   

 

 

요한복음 9장 1-7절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본문의 사건은 요한복음에 소개된 7가지 표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총의 빛을 경험해야 밝히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야 다가오는 환난과 심판도 피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5).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치료하시기 전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다’라는 말을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사물을 볼 수 있는 ‘성한 눈’이 있어야 하고, 또 ‘빛’이 있어야 합니다. 눈앞에 아무리 멋진 장관이 펼쳐져도 눈이 온전치 못하면 볼 수 없습니다. 성한 눈, 온전한 눈을 가지고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또 눈이 온전하다 해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눈은 빛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눈이 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빛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빛을 통해서 보는 겁니다. 빛이 차단된 동굴에서 사는 동물이나 벌레들의 눈이 퇴화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눈이 있어도 볼 일이 없기 때문에 아예 볼 수 없도록 퇴화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고쳐주시기 전에 “내가 세상의 빛”이라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한 눈과 함께 빛 되신 예수님의 조명을 받아야 비로소 세상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8절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라고 책망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눈앞에 펼쳐진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 8:18)라고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밝아 세상의 이치를 통달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영적인 세계는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보아야 하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더욱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쪽에서 쓰나미가 밀려와도 보지 못하면 피할 수 없는 겁니다. 또 쓰나미가 밀려오는 징조를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역시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보고 깨달아 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환난을 면할 수 있는 겁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하십니다. 보이는 자, 볼 수 있는 자가 복이 있는 겁니다. 소경된 자는 재앙을 피할 수 없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때는 함께 재앙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고치시고, 또 스스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밝히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2. 고난의 원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1-3)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본 제자들이 “그가 소경된 것이 그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소경된 자가 겪는 불행의 원인이 ‘과거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된 자가 겪는 고난은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고난이라고 말씀 하십니다(3). 과거의 죄가 아니라 미래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이 주어졌다는 색다른 해석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 가운데는 분명히 과거의 잘못으로 기인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고난의 원인을 과거에서만 찾으려고 하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장차 얻게 될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이 있다는 적극적인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을 회개와 연단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 40년의 고난을 통해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여호와의 군대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도 그가 겪은 고난을 통해 빛 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겪는 고난”(3)이 있다 하십니다.

 

3. 하나님의 사람들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에 힘써야 합니다(3,4).

 

예수님의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자, 그가 소경된 것이 그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따져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소경을 제자들이 정죄하는 마음으로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본 예수님은 그를 정죄로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를 이 불행한 운명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심으로 그의 눈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인들을 정죄의 마음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바리새인 서기관은 간음하다 붙들린 여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데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죄인들을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도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한국교회에 문제가 많습니다. 한국교회는 말씀에서 벗어나 배도의 길을 가고 있는 비정상적인 교회요, 병든 교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한국 교회를 바라보면서 정죄와 심판으로 대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우리가 마지막까지 힘써야 할 것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하고 살리는 일입니다. 교회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종말론에 무지한 한국 교회가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지”(호 4:6) 않도록 부지런히 가르쳐 주의 오심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정죄가 아니라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겁니다.

 

4. 실로암(5-7)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말씀하신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밝히기 위해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6). 예수님이 진흙을 발라 병자를 치료하신 것은 오늘 본문에만 등장하는 특이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구태여 진흙을 만들어 눈에 바르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 소경을 치료하셨을까요? 소경 바디매오처럼 말씀 한 마디로 치료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왜 이런 어려운 절차를 거치신 것일까요?

 

진흙을 발라 소경의 눈을 치료하신 이 사건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던 창세기의 사건(창 2:7)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본문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이 사건을 ‘치료’보다는 ‘창조의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경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이 그냥 소경이 아니라 날 때부터 눈동자가 없는 ‘선천적 무안구증’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있는 눈동자 자체가 없기에 예수님이 진흙으로 눈동자를 빚어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넣어주셨다는 겁니다.

 

여하튼 이렇게 소경된 자의 눈에 흙을 발라주신 예수님은 다시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소경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을 때 그 눈이 밝아졌다(7) 했습니다.

 

실로암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쉴로하’에서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49장 10절에도 야곱이 유다 지파에게 축복을 비는 말씀 가운데 ‘실로’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실로’는 장차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실 메시야 즉,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에 있던 ‘실로암 연못’은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연못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곳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실로암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의 물로 눈을 씻어야 우리의 눈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눈이 밝아져야 비로소 세상을 밝히 볼 수 있고, 다가오는 환난과 심판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을 치유하시고, 또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십니다. 실로암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물로 씯어야 우리의 어두운 눈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시대의 징조를 분별해야 임박한 환난과 심판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겁니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전에/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