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어서 받는 복!

2013. 3. 15. 10:10성경 이야기


예수 믿어서 받는 복!


제가 개인적으로 참 존경하는 '낮에는 해처럼, 밤에는 달처럼' 이라는 선교쪽지의 발행인이자 여러 복음성가의 작곡자이기도 한 최용덕 간사님이 딸 로아를 2008년 6월 11일에 떠나 보내고 난 직후에 쓰신 글 중의 하나입니다.

열여섯 살짜리 딸아이를 천국고향으로 먼저 돌려보낸 지 이제 두 달이 좀 지났습니다. 처음 한 달 동안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때때로 딸아이를 생각하면 그리움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거기서 즐겁게 잘 지내고 있겠지? 너무 재미있어서 엄마 아빠 동생은 기억하고 있나 몰라?’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두 달 보름 전, 중환자실에서 딸아이가 막바지 투병을 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포항에서 제 부모님이 서울 병원으로 올라오셨습니다. 벌써 수년 째, 먼 곳으로는 여행하지 않으시는 아버지께서 서울까지 친히 올라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들어서신 아버지께서 저희와 대면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처음 꺼내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래! 예수 잘 믿어서 기껏 이런 일 당하는 기가?”
 

어머님을 비롯하여 우리 사 남매 자녀들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었건만, 아직까지도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못 마땅해 하시는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당신의 맏아들이 어린 자식을 중환자실에 넣어놓고 있고, 손녀딸은 육신적으로 생사의 기로에서 치열한 투병을 하고 있는 그 상황에서 아들과 며느리를 대면하여 처음 꺼내시는 첫 마디가 그 말씀이라니!

하지만, 저는 빙긋이 웃으며 아버지의 그 모진 말씀을 그냥 받아넘겼습니다.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아버지로서 손녀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속상함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신 것이려니 여기며 말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난 세월 동안, 기독교의 기초적인 복음을 아버지께 전하기는 했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저의 지난 삶을 통해 그것을 충분히 증거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께서 이해하시는 기독교는 아직 여느 기복(祈福)종교 수준인 것입니다.

아버지께선 그저, 예수를 그렇게 열심히 잘(?) 믿어왔으면 재물의 복도 받고, 자식들도 잘 되고, 건강하게 오래 잘살고, 그래서 보란 듯이 세상에 떵떵거리고 고개 쳐들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용덕이 너의 인생은 어째 이 모양이냐는 것입니다. 용덕이 네가 믿는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어린 자식에게 이런 몹쓸 병까지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단지 무신론자이신 저희 아버지 같은 분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같은 기독교인 가운데도 의외로 그런 식의 신앙관을 가진 분들을 많이 접하곤 합니다. 예수 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입니다. 또 반드시 그래야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몹쓸 병이라도 들거나, 사업이 어려움을 겪거나, 자식들이 승승장구하지 못하거나, 고난의 골짜기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라도 하면, 그것은 영혼이 병들어서이고, 무슨 죄를 지어서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봅니다. 물론 비기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은 그런 상황들을‘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로 여기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너무도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를 이 세상의 여느 다른 기복(祈福) 신앙의 종교들처럼 여긴 탓입니다.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신앙하고 잘 섬기면 과연 무병장수(無病長壽)하고, 하는 일마다 다 잘되고, 세상 속에서 승승장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큰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자식들도 다 잘 되어서 일류 대학에 입학하고, 일류 기업에 채용이 되어서 부모의 명예를 높여주는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그런 표현이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약속을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거나 그러한 것들을 복(福)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도, 선하시고 좋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자녀들이 몸도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넉넉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을 바라지 않으실 분은 아닙니다. 그것을 간절히 원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더더욱 말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 사회적으로 존경과 인정을 받는 것,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서로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 간절히 빌어주거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추구하고 비는 차원이 아니라, 그러한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의 영혼이 만족하고 평안을 누리고 감사의 삶을 사는 차원이 기독교의 신앙인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라는 말은, ‘설령 육신적으로 전혀 잘 먹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해도’라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아도 평안하고 감사하고 기쁘지만, 설령 잘 먹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해도 여전히 평안하고 감사하고 기쁜 삶,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인생의 주인과 스승으로 섬기며 사는 삶은, 지금까지 세상이 복(福)이라고 여기던 것과는 훨씬 높은 차원의 복(福)을 추구하고 사모하는 삶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친히 복(福)이라고 가르치신 그것들을 추구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선, 몸 건강하고 재물이 풍요롭고 자식들이 승승장구하고 무병장수하는 것이 복되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선 산상수훈에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복(福)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의(옳은 일)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자비로운)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하다. 의(옳은 일)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말로 온갖 악담을 할 때에 너희는 행복하다. <마태복음 5:3-11>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을 너무도 측은히 여기시며 그들이 당신 앞으로 나아오면 일일이 다 고쳐주셨습니다(마8:16). 제자들에게도 병든 자들을 고치라는 부탁을 잊지 않으셨습니다(마10:8).

그러나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당신을 따른 모든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건강이나 재물의 부요함이나 사회적 승승장구를 복(福)이라고 가르치지 않으시고, 그런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가르치신 복은, 육신의 건강이나 재물의 부요함이나 사회적 명예나 지위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 건강하고 부요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기독교가 말하는 복이라고 말한다면, 달리 말해, 병들고, 지지리도 가난하고, 사회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하고, 비참해 보이는 생애를 사는 것은 복이 아니요 저주라고 말한다면, 제일 먼저 걸리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출생 자체가 비참했습니다. 마지막 공적인 생애 3년을 빼고는 일평생을 가난하고 천한 목수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사셨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분에겐 몸 하나 누일 자기 집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두 벌 이상의 옷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누린 천수(天壽)는 장수(長壽)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서른 세 해 뿐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요절했습니다. 그것도 그 당시에 가장 모욕적이고 극형이었던 십자가형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대외적으로 일하신 기간은 고작 3년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 대신 희생을 치르신 분이어서 그렇게 비참한 생애를 살다 가셨으나,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이제 잘 먹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항변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예수님은 그렇다 쳐도,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애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러 제자들 가운데 정상적으로(?) 이른 바 천수(天壽)를 누린 이는 사도 요한 한 사람 뿐이요, 나머지 제자들은 전부 다 그야말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은 스승과 같은 끔직한 십자가형을 받았고, 어떤 이는 참수형으로(바울, 맛디아), 어떤 이는 돌에 맞아서(두 명의 야고보), 어떤 이는 사지가 찢기어(마가), 어떤 이는 창에 찔려(도마, 마태) 죽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전파의 일등 공신인 바울의 생애를 봐도 소위 잘 먹고 잘 사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당시 사회적 배경과 초기 기독교 복음의 전파 사명을 전투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그가 치른 온갖 고초와 박해와 살해 위협은 그렇다 치고, 그는 참수형으로 죽는 날까지 일평생 불치병을 앓았습니다. 남의 병은 고치면서도 자신의 병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질병을 끝내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설(說)에는 그가 앓은 병이 눈병(안질)이었다고도 하고 혹은 간질이었다고도 하는데, 그것이 안질이든 간질이든, 다른 이들 앞에서 참으로 민망하고 초라해 보이는 병인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따르며 섬기기로 한 사람들 가운데 ‘재산이 점점 늘어나고 부요해졌더라’는 사람의 기록은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가지고 있던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느라 점점 가난뱅이로 변신해갔습니다.  

 

그 혹독한 신앙적 핍박 가운데서도 예수를 충성스럽게 신앙하였던 예루살렘 지역교회 신자들은 당시 그 지역을 엄습한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러한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겠다고 나선 마케도니아 교인들조차도 ‘온갖 어려운 시련과 가난에 쪼들리는(고후 8:2)’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참하고 처참한 처지에서 일평생을 살아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이지만, 그들은 전부 예외 없이, 너무도 평화롭게, 너무도 커다란 감격과 기쁨과 감사로, 너무도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불쌍하고 궁상맞고 초라해 보이는 그들의 일상의 삶이었고, 결국 그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었지만, 바울의 고백을 빌리자면 “우리는 슬퍼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고후 6:10).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추구한 복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잘 먹고 잘 사는’그런 복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바로 그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양식이 없어 잘 먹지 못하고, 그래서 혹 몸이 병들어도, 혹은 물질적으로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어도, 그것이 그들에게는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의 복: 「마음이 가난」해 지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그들은 그 가난과 질병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살면서 못된 주인으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을 당하여도 그들은 오히려 감사하며, 그런 주인에게도 기꺼이 복종하였으니(벧전 2:18-21)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의(옳은 일)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을 그들이 복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고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일이며, 바로 그러한 삶을 위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벧전 2:20)는 사실을 그들이 뼈에 사무치게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병에 걸리지 않나요? 아닙니다. 그 능력과 열정의 사도 바울도 불치병을 일평생 앓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가난과 상관이 없나요? 아닙니다. 그들도 기근과 혹독한 가난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명망과 지위를 얻는 복을 누리게 되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겠으나 오히려 신앙의 지조와 정직과 순결함 때문에 따돌림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도 훨씬 높습니다.

뇌의 종양(암)으로 열여섯의 나이로 이 세상을 먼저 떠난 저희 딸아이 소식을 듣고 친필로 정성과 사랑의 위로 편지를 보내셨던 이해인 수녀님, 불과 얼마 후에 신문에서 그분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 후 치료 중이시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결혼도 않고 일생을 주 예수님의 신부로 성결하게 사신 수녀님도 암이 걸립니다.

암이 걸렸다고 저주인가요?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나님의 진노를 입은 사람인가요? 남들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아주 비참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지지리도 복도 없는 사람이며, 사업이 망했다고, 진학이나 진급 시험에서 낙방하였다고 그것이 다 죄의 형벌인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그런 것과 기독교의 복(福)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육체의 잘 먹고 못 먹는 문제, 살고 죽는 문제를 뛰어넘는 차원의 것입니다.  

 

우리가 끔찍한 저주로 여길 수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이 우리를 뒤덮고 있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복음은 그 극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평화와 찬미와 감사를 누리게 합니다. 또 그러해야만 참된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5-39>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문제에 꼭 같이 부딪칩니다. 일을 잘 못하면 성과를 못 내고, 실패도 하고, 돈도 못 벌고, 스트레스를 받고 몸 관리를 못해서 면역이 약해지면 병균에 의해 온갖 병에도 걸리고, 각종 유전적 요인과 환경호르몬의 영향을 받아서 여러 암에도 걸립니다.  

 

실수나 잘못에 의해 감옥에도 가고, 큰 벌금형을 받기도 합니다. 거기다가 신앙 때문에 온갖 고난과 핍박과 손해를 더불어 감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고백대로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저주거리 같은 것들에 둘러싸여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주 예수님을 힘입어서 능히 이겨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비참하고 참혹한 상황도,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끊어놓을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주 예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육체적으로 잘 먹고 잘 살거나 물질적으로 부요하거나 사회적으로 높아지고 영예를 얻는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들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있고 없고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 주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고 추구하는 바가 세상적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아무 근심거리가 없고 승승장구하는 그런 복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마음이 겸손해지고 가난해지는 복을 받기를,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해하며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눈물의 복을 받기를, 언제나 타인을 향해 너그럽고 따뜻한 온유함의 복을 받기를, 옳은 일에 대한 갈급함의 복을 받기를, 인간 자체에 대한 긍휼과 자비심을 지니는 복을 받기를, 잔꾀나 더러운 방법을 추구하지 아니하는 깨끗한 마음의 복을 받기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화합하도록 만드는 피스메이커가 되는 복을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복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하던 사업이 잘 안되어 망하여도, 가난하여 하루에 한끼 밖에 먹지 못하여도, 몸에 중병이 와서 병상에 누워 있어도, 어떤 이유로든 사랑하는 자식이 일찍 세상을 떠나도, 세상 사람들이 미천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어도, 원망하고 불평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상황들이야말로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복(福)들을 받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기업가는 원치 않게 경제사범이 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옥중 생활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교만을 깨닫게 되고, 진정한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며,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실을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저희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었노라는 분의 편지도 받은 적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반드시 몸도 건강해지고, 병에도 안 걸리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지며, 자식들도 잘 되고, 사회적으로도 영예가 높아지는 만사형통의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래서, 그와 같지 아니한 사람들은 뭔가 문제가 있고, 하나님을 제대로 신앙하지 않는 사람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만 가르치고 다른 하나는 가르치지 않는 분들입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기독교 신앙을 참으로 하찮고 저급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태도입니다. 기껏해야 다른 기복종교와 다를 것이 없는 기독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신론자이신 저희 아버지께서도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너,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예수 믿었는데, 그 결과가 겨우 이거냐? 네 열여섯 살짜리 어린 딸이 암에 걸려서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 거냐? 그런 하나님을 뭐 하러 믿어?” 

 

하지만,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는, 그러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저울질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일들은 무조건 복이 아니라 저주나 징벌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은 그런 복이 아닙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주 예수님과 함께 인생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받아 누리는 복(福)만으로도 충분하여, 더 이상 다른 복을 구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최악의 경우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상황도, 그것은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가장 「최선의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 앞에서는 그 어떤 고난과 시련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힘을 잃고 맙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큰 복(福)입니다. 그러니 이 복을 소유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일생을 승리자로 살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이 복을 이미 받은 사람이라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이 복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출처: 주님 오시는 발자국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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