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2013. 7. 1. 13:10성경 이야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 2:5)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애통하여도 너희가 통곡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마 11:17)  

 

소계시록이라 일컫는 마태복음 24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께서 나가서 성전에서 떠나시자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들을 주께 보여드리려고 나아오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더라.’  

(마 24:1-2) 

 

예수님의 관심은 성전의 주인이신  

자신을 영접하지 못하는 유대인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셨으리라. 

 

그러나 시골에서 올라온 제자들의 관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세운 웅장한 공든탑이었다.  

 

세월은 흘러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엇박자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 

지금은 심을 때가 아니라 거둘 때라고 곧 엄동설한이 닥칠 것이라고,  

이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성을 대망할 때라고 가르쳐 주시건만  

장망성, 바벨론 성을 쌓고 있는 제자들이 세상에는 어찌 그리도 많은지?  

 

그러나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는  

한 개인이나 한 사회나 국가, 나아가서는  

지구의 운명을 결정짓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를 지시고 하신 말씀이 정말 새롭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그날이 오면 그들이 말하기를  

‘잉태할 수 없는 자와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태와  

빨려 본 적이 없는 젖이 복이 있도다 하리라.  

그때 사람들이 산에게 우리 위에 무너져 내리라 하며,  

또 언덕에게 우리를 덮으라고 말하기 시작하리라.” 

(눅 23:29,30)

 

이 시대의 성경적 삶의 자세는  

애통과 탄식으로 준엄하신 주님의 심판의 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리라. 

 

‘인자야 부르짖어 슬피 울지니라.  

이는 그것이 내 백성에게 임할 것이요,  

그것이 이스라엘의 모든 고관들 위에 임할 것임이라.  

그 칼로 인하여 공포가 내 백성 위에 임하리니  

네 허벅지를 치라.’(겔 21:12)  

 

우리의 이웃 나라 일본의 쓰나미는  

노아의 방주 사건을 연상시키며 한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틀림없이 핵무기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북한은  

자기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며 틈만 나면  

너 죽고 나 죽자고 광기를 부린다. 

 

일본과 북한에게 갖은 풍상을 다 겪은 탓일까? 

이제는 그런 일쯤은 찻 잔 속의 풍랑일 뿐이라  

여기 이 시대 ‘평안하다 안전하다’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그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자들과 일반이라. 

 

주님께서는 정말이지 기록된 말씀과  

같은 온갖 징조들을 통해서 이 백성을 깨우고 계시건만  

너 나 할 것 없이 牛耳讀經이요, 東問西答이다.  

 

이 시대 성직자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다는  

대적하는 일들이 더 많다면 거짓말이겠는가? 

 

“나의 성직자들이 나에게 채찍질을 한다.  

그들은 나의 고통을 알지 못하며 나를 낯선 사람처럼 대한다.

교회 안에서 나의 성직자들은 거만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다.  

이 얼마나 큰 고통이냐? 그들은 신앙심도 없고 그들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아멘이시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신 주님께서  

이 라오디게아 시대의 교회들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고...  

 

에녹은 다가올 휴거될 신부들의 모형이다. 

그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두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암 3:3) 

 

동행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에 동의해야만 한다. 즉 

 에녹과 같이 휴거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될 것이요,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 분의 뜻을 알아야 한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글을 읽으시며  

자비로우신 그 분의 면전에 자복하는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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