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제한하는 이 시대 성도들을 보면서

2013. 9. 23. 22:38성경 이야기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신이시지만


황송하옵게도 그의 창조물에 불과한 우리를 들어 사용을 하시고


모든 일을 하심에 있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게 하시며

우리의 협력을 원하시는 것을 안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감지덕지 하는 마음으로

우리 몸과 인생 전부를 기꺼이 드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셔서 하나님 앞에 버러지와 같은 인생을 

당신의 하시는 놀라운 일에 협력할 일군들로 쓰시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를 굳이 대답한다면 우리에게 수고한만큼 상을 주시고,복을 주셔서

영생복락을 우리와 더불어 누리시기를 원하시고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국 건설을 홀로 독단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부탁하시고

우리에게 의탁하시면서 동역할 일군들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허물많은 우리와 같이 하길 원하셔서


얘야, 너는 너의 형제의 약점을 맡아주고

얘야, 너에게는 화목의 십자가를 부탁하노라.

그리고 너는 고생스럽지만 마지막 복음을 부탁하노라.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않되는 환란이 당할지라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일찌기 세상을 이기셨던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일을 부탁하셨던 것이다.


♬ 주 내게 부탁하신일 천사도 흠모 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런데 우리들은 고작 한다는 소리가

"주님,이것만 해 주세요.
주님, 저것은 내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니 가벼운 것을 주소서,

나는 대 환란 같은 더 이상의 고난은 무서워서 싫습니다.

그냥 휴거만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는 이것밖에 못하니 다른 것은 내게 요구하시지 마십시요~"

 


마치 이런식의 사고방식으로 물들여지고,

또 그렇게 길들여진 믿음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의 다시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이 눈에 보여진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일컬어 소위 깨어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깨어 있는 믿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지음 받은 인간들이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황송하게도 제한해 버리는 꼴이 되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필경은 내가 스스로 받을 복에서 제한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여 버리고 있다.


예수님도 육체로 계실때에 십자가 지시는 일을 앞에두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시므로 사람의 육체의 약함을 여과없이 보여주셨다.

 

이것은 실상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속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육신의 연약함 때분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나의 원데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데로 하옵소서"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자기 육신의 생각을 버리시고 기도로 승리하셨다.

 

오늘도 우리들이 얼마나 좁은 자기 생각으로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천지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을 제한하려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밴데기 속만한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되는데 최종 목표는

주님의 마음처럼 넓혀야 된다.

주님이 아버지 뜻데로~ 바꾼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 뜻데로~


아브라함도 3일길을 가는 모리아 산까지 갈것없이 바로 이 앞산이든지

뒷산으로 하든지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면 그 만큼 하나님을 제한하는

자가되고 그의 믿음은 밴데기 속만큼이나 좁아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조금도 제한하지 않았다.

삼일 길을 가라하면 모리아 산까지 갔고,

독자를 죽이라하면 군말 없이 한 마디 항변없이

칼을 들고 아들의 목을 향하여 찔렀으니

이는 하나님을 조금도 제한하지 않았으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만세에 빛나는 칭호를 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면


 

1, 불신앙이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자라나신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에 놀래었지만,

아멘으로 받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출신 성분을 따지고 믿지 아니하니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더는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더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천하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지않는 불신앙 가운데서는 

도무지 역사를 하실 수가 없으시므로 불신앙은 하나님을 제한해 버리는 것이다.


 

2,사람의 고집과 아집이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구상에 어느 누구에게도 팔방미인 되게하지 않으시고 2%부족하게

창조하신 것은 그 부족한 2%를 형제라 일컫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채우시어

온전한 교회를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조금씩은 다 부족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에 누가 자신을 완전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로

아주 많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인것은 창조주께서 원래의 사람을 2% 부족하도록 

창조하신 것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작은 지식만을 옳다고 내세우며 그것이 지식의 전부인양 고집을 부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셨던 부분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많이

제한하고 있는것이다.

 

내가 받은 은사도 수 많은 것 중에 하나를 나에게 주셨을 뿐이므로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도 존중하여 용납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서로 피차 협력을 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받은 은사가 다르고 네가 받은 은사가 다르니까

나는 당신과 하나될 수 없어서 따로 국밥식으로 각각 자기 것을 내세운다면

내가 받은 작은 은사로 하나님을 제한해 버리는 것이다.


 

3,체험주의도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체험은 귀한 것이지만 자기의 체험한바가 성경적인 것인지, 정말 옳은 것인지

돌아볼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체험만을 내세운다면 때로는 하나님을 제한하는

무서운 잘못을 범하는 겨우가 너무도 많게 되어진다.

 

카토릭에서 10여년 전에 회개하고 돌아와서 목사가 되었다는 어떤 분을 만났는데

예수님이 환상중에 마리아와 함께오셔서 하는 말이

"내 어머니는 나와 공동 구속자니라"

라고 했다고 하면서 마리아도 주님과 더불어 공동 구속자라고 고집을 부리므로

그와 교제를 단절해 버린적도 있다.

 

이 사람은 마지막때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데 

하나님이 이런 분을 어찌 제한 없이 쓸 수가 있겠는가?

잘못된 체험주의가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체험은 고귀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지만

체험주의는 하나님을 많이 제한해 버리는 독약과 같다고 하겠다.


 

4, 영에 속하지 못하고 육에 속한사람은 하나님을 제한하여 버린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나아오고 그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따라 올라와서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들을때 

밥먹으러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사흘이나 집회는 계속이 되기도 했었으므로

그냥 돌려보낸다면 기진하여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할 만큼 이었으므로

그래서 그들을 먹여 보내려고 행하신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 들어와서 보면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맛을 본 사람들이 몰려오자 설교의 수준을 높여서

떡에 관한 영적인 설교를 하셨다.

 

그때나 지금 형편이 나아진 오늘을 막론하고 최대의 관심은 경제문제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바라는 관심도 경제문제가 가장 으뜸되는 문제이다.

 

떡 곧 먹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온 자들에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서 내리는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고 하셨을때 유대인들은 단박에 반응하기를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라고 했을때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유대인들은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예수에 대하여 수근 거리기를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한 것이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참 떡이니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만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라고 하셨을때도

 

아~ 이 사람이 어찌 우리에게 제 살을 먹게 하겠느냐? 불평이 터져 나왔다.

도무지 이해가 않되고 믿을 수 없어서 다 물러가 버리고 12제자만 남게 되었다.

 

오늘도 예수님이 오셔서 영적인 의미의 설교 하신다면 이해를 할 수 없다고

받기를 거부하는 현상이 얼마든지 생기는 것은 영적인 믿음이 없는 까닭이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의 일이다.

 

영의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에 속한 사람들은 범사에 모든 일을

육신의 생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헤아리기 때문에 영의 일들을

알 수 없고 영적인 설교나 설명을 이해를 하지못하므로

결국에는 신령하신 하나님을 거스리고 제한하게 되고 만다.

 

 

5,교만한자도 하나님을 너무도 많이 제한해 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고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기 때문에 

교만한자는 도무지 들어 쓸 수가 없고, 쓰다가도 버리는 것이 교만한 사람이다.

 

교만한 사울을 버리시면서 겸손한 다윗을 보시고 당신의 뜻을 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시리라 하시더니 과연 이 사람의 씨에서 그리스도가 오시게 된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거의 무제한으로 쓰신 것에 우리는 부러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6,잘못된 선입견과 삐뚜러진 고정관념이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과 똑 같은 일을 보면서도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한다든가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되는 것은, 똑바로 보는 정직한 눈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고 할 수 있겠다.

 

 

7,게으름과 나태가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녀들을 위하여 오늘도 쉼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일하심을 증거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고 하심을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구원사역을 힘쓰시고 계신다.

 

그런데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어찌 쓰겠는가?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에게 권면하시기를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다.


 

8,살려고 아등바등 거리는 것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요, 살고자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하나 같이 살려고만 몸부림 친다면 하나님은 쓰고 싶어도 도무지

쓸 수가 없으니 살고만 싶어서 아둥바둥 거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는가!

 

 

설교에 가까운 나의 칼럼을 이제 마치면서 소아시아를 비롯하여 남 유럽과

당시 서바나로 알려진 스페인과 포루투칼을 휘젓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

 

그 사도 바울을 주님이 거의 제한 없이 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마지막 3차 전도 여행에서 유대인의 최대의 명절인 오순절에

예루살렘으로 바삐 들어가려고 서두를때 기도하는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유대인중에는 바울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가지말라고 만류할때 했던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뿐만이 아니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 하였느니라"

 

인생은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는 것이니

사고나서 죽을 수 있고

병들어 죽을 수 있으며

남에게 불행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데

기왕이면 한 번 죽는 목숨 주를 위해 죽으리라 각오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서는 제한을 느끼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지구 역사상 가장 큰 환란을 앞에두고 사는 오늘의 우리 모두가

일사각오의 신앙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자유롭게 제한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신부단장의 단장품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겠는가

싶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면서 옥고를 치루고 또 붙잡혀 갈것을

내다 보면서 일사각오의 마지막 설교를 외쳤던 주기철 목사님도

살아 볼려고 일제와 타협하며 신사참배를 찬성하였던 조선기독교회가

제한해버렸던 그 하나님을 그 목숨을 던져서 자유롭게 해 드렸던 것이다.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절(貞節)의 신앙으로 단장하는 신부들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자유롭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며

이런 신부들은 세상에 두기도 아까워 데려갈 것이지만

 

흠과 점과 얼굴에 죽은깨와 같은 티가 수두룩한 예수님의 신부들이

그저 육으로만 살고 싶어서 못해요, 싫어요, 이렇게 해주세요 식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면서 살고 있는 신부들을 과연 데려가고 싶을까?

 

만일에 데려간다면 영광의 잔치에 참여 보다는 잔치후에

설겆이 시키려고 잔치 도우미로 데려가실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님도 예쁜 사람을 보면 사족을 못 쓰실만큼 예쁜 신부를 좋아 하신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무제한으로 쓰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쁜 신부감일 것이다.

 

 


 출처; 내 영혼의 마지막 부흥; 진형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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