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2부

2013. 12. 3. 21:16성경 이야기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2부



 성령운동이 아니라 주술운동


성령운동이라는 말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하지만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아주 잘못된 말이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운동을 하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드러내고 에수님의 사역과 이름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성령의 특성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가 굳이 운동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면 성령은 성령운동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운동을 하는 분이라고 말을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운동을 하는 성령사역을 강조했다. 그러나 작금에는 성령의 이름으로 인간을 높이는 성령운동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마치 우리마음대로 성령을 운행하고 조정할수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부적합한 용어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성령을 조정하고 움직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자유롭게 편하게 사용하셔야 한다. 성령은 우리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사용할수 있는 에너지나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사모하고 순종해야 할 인격적인 대상이다.


한국교회에 성령운동과 집회가 많이 열리기에 그만큼 성령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지만 어찌보면 오히려 성령님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성령님을 참으로 사랑해서 매일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고 성령님과 함께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성령운동과 집회가 열리고 있지만 정작 그런 운동에서 나타나야 할 열매,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작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없이 광신적인 운동으로 성령운동이 전락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이고,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주술이다. 성령운동이 자칫 잘못하면 주술운동으로 변해가고 있다.


성령을 인간의 도구로

최근 성령운동에서 임파테이션이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사용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다른사람에게 전수해 준다는 말이다. 은사집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안수를 통해 방언과 예언과 병고치는 은사를 전수해 주고 성령의 기름을 그에게 흘러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무시하고 성령을 하나의 인간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반면에 인간을 신격화하는 말이 될수가 있다. 자신이 마치 성령님을 유출시킬수 있는 성령의 원천처로 생각하는 위험에 빠질수 있다.


성령님은 신적인 인격이다. 이것이 성령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인식이다. 성령님이 인격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신앙은 붕괴된다. 구원도 있을수 없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도 불가능하게 된다.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 능력이나 영향력이라면 우리들에게 구원의 효력과 은혜를 전달하는 채널역할을 할수 있지만, 주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우리들에게 중재해주는 채널은 될수 없다. 신적인 인격을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임재가 불가능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구원의 경륜과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면 삼위일체적인 신앙이 붕괴하게 된다. 성령을 통해 우리안에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적인 신앙이 붕되된다. 입으로는 삼위 하나님을 고백할지라도 성령을 자신이 마구 끌어당겨 사용할수 있는 능력으로 취급하는 일은 하는 사람은 이단자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인들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체함함으로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 그리고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에서 부터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기도와 예배가 나오게 된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교리보다 체험이 앞선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함으로 거룩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이 가장 자애롭고 친밀한 아빠로 체험하게 되었다. 아빠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가운데 부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그들의 존재속으로 밀려들어옴으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물러나고 부활의 능력과 생명력이 그들안에 밀려들어와서 그들을 주관하고 점령하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게 된것이다.


초대교인들은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잘 정리하고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는 없었지만 성령체험을 통해 그들의 삶속에 삼위 하나님의 부요한 임재와 축복을 만끽하는 삶을 산 것이다. 현대교회는 초대교회에 비해 아주 정교하게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는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속에 삼위 하나님의 부요한 임재와 그 분과의 깊은 교제의 체험은 많이 결여되어 있다. 교인들이 입으로는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그들의 삶속에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순위이든지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살아가는 것과 같다.


성령체험의 3박자


성령체험의 3박자는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빠로 체험하는 것이다. 아빠의 사랑이 우리안에 밀려들어옴을 체험하게 되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생명력이 우리를 사로잡은 것을 체험하게 된다. 두번째 성령체험의 축은 성령을 체험하면 나를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평안해진다.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내가 평안해 진다. 짓눌렸던 내가 자유해진다. 겁먹었던 내가 관대해진다. 새로워진 나를 체험하게 된다. 주님을 사모하는 나, 주님을 닮아가는 나, 아름답게 변화되는 나를 체험하게 된다.


성령체험의 3번째 축은 너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이용할 대상으로 너는 있지만 사랑하고 교제하고 내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서 너와 당신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우리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를 참으로 섬기고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삼위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나를 체험하게 되고, 그리고 너를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천국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체험의 3박자이다.


한국교회에 그렇게 많은 성령집회가 열리지만 진정한 성령체험은 희소하다. 대부분의 성령집회가 은사체험과 초자연적인 현상에 온통 관심이 집중한채 성령체험의 심장과 영원이라고 할수있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빠져있다. 성령체험을 모든 다른 영의 체험과 구분하며 기독교 영성을 다른 모든 영성과 구별되게 하는 삼위일체적인 특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렇게 성령운동이 불건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고 본다. 신비적이고 열광적인 것에 끌리는 한국교인들의 종교적인 심성과 단숨에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갈구하는 영적인 요행심이 이런 성령운동과 잘 맞아 떨어졌다고 볼수있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아서 방황하는 많은 교인들에게 그런 성령운동은 금방이라도 그들에게 놀라운 구원과 변화를 가져다 줄 것 같은 기대를 안겨주기도 한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종교적인 흥분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을 보아야 믿음이 지탱되고 믿음의 열심을 낼수있는 미성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성령운동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박영돈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


출처: 아멘넷뉴스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6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