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강도(사탄) 만난 자들이다

2020. 12. 5. 03:30하늘나라가는 비밀문

  죠지 윗필드:내가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붙잡을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양자의 영을 내게 주심으로영원한 구속의 날까지 나를 인쳐 주셨다.

강도(사탄) 만난 자

예수를 시험하고자 한 율법사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당당하게 예수께 질문을 던졌다.(눅10:25)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 찬 이 율법사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심으로  '나는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이웃이 누군지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예수께 물었다.
그러자 그 율법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강도 만난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강도만난 사람은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에서 저주의 성인 여리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이 때 강도들이 달려들어 그를 거의 죽게 때려놓고 도망가 버렸다.
이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영혼의 옷) 벗기고 흠씬 때려 거반 죽은 거나 다름없이 해놓고 버리고 간 것처럼 우리도 사탄이라는 강도를 만나(우리영혼) 길가에(인생길) 누워 죽기를 기다리는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지옥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에덴동산에서 사람의 타락 후 인생의 노정에서 사람에게는 참된 평화와 참된 기쁨이 없다. 시기하고 미워하고 살인하는 등 끊임없이 고통과 저주가운데 살다가 때가 되면 결국 죽어야 할 운명이다.
내 영혼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도와줄 이웃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 줄 이웃을 찾아야 된다.  우리 속에서 주님이 100퍼센트 일하시려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발버둥치지만, 아직까지 그들 속에 ‘내가 십일조 잘 내고, 주일 잘 지키고, 율법을 잘 지키면 천국에 갈 것이다.’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강도 만난 자는 율법을 가장 잘 엄수한다는 제사장이 저 멀리서 다가오자 애처로운 눈빛으로 제사장을 쳐다보면서 구해주길 기다렸다. 그런데 제사장은 그를 구원해 주기는커녕 고개를 돌리고 피해 버렸다. 그 모습에 강도 만난 자의 마음에서 소망이 허물어져버렸다.
아마 제사장은 속으로 ‘저 사람은 필시 십일조를 떼어먹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벌 받고 있을 거야’라고 속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후에 레위인이 오고 있었다.
‘아까 제사장은 나를 구해주지않았지만 저 레위인은 나를 구원해 줄지 몰라!’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그는 가졌으나 레위인 역시 그를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
또한 레위인은 ‘저 사람은 필시 간음하고 뇌물 많이 받고 토색해서 강도를 만났을 거야’라고 판단하면서 못 본체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자 ‘누군가가 와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이다.’라는 그의 마지막 소망마저 무너져버렸다.
구원은 그 때 시작된다. 모든 소망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 그 자리에 예수님은 역사하신다.
‘이윽고 어떤 사마리아인이 가까이 가서 그 사람을 구원해 주었다.’ 
이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에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기 위해 일부러 그 길로 지나갔다.
이 강도 만난 자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을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바랄뿐이었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인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이 아주 천하게 취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비하할 때 ‘당신은 사마리아인이다’라고 공격했던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시대 율법을 대표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 강도만난 자를 구해주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다.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예수)이 강도 만난 자에게 포도주와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데나리온 둘은 주님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는 속죄의 가치를 말한다.
주님의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만 가지고 너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주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지 결정적인 핵심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 상처를 싸매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잘하려고 열심내고, 노력할수록 사마리아인은(예수) 멀어져간다. 왜냐하면 자기가 열심히 해서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기는 죄가 없고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마리아인이(예수) 굳이 그를 위해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존관념은 우리의 열심으로 이웃에게 선한 행실을 하면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