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 2

2014. 7. 23. 23:13하나님의 이기는 자들


 

단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신뢰함으로 죄의 몸을 죽은 자처럼 시들고 무력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다면 우리 옛사람은 다시금 살아날 것이고 권위를 행사할 것이다.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문제는 분명 매우 어렵지만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는 성도로 하여금 죄를 이기는 것을 가능케 하고 성령은 십자가가 성취한 것을 믿는 이의 생활 속에서 실제가 되게 해준다.

 


죄에서 해방되기 원하는 성도는 육체를 위하여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 깨어 있어야함은 물론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말고 더욱 더 성령께 신뢰를 두어야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십자가의 죽음은 다른 어떤 죽음과 다른 고통스럽고 느린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여겼다면 분명 당신 안으로 임한 특별한 능력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여김이 나는 죽었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자신의 의지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판단과 믿는 마음으로 여기는 태도를 유지하는 문제이다. 당신이 기꺼이 죽고자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게 된다.


우리는 의지와 믿음으로 여기기를 배워야한다. 만일 믿는이가 참으로 롬 6:11위에 서있다면 우리는 연속적으로 죄로부터 해방되는 체험을 가질 것이다. 믿는이가 이러한 태도를 취할 때 사탄은 의도적으로 폭풍을 일으킬 것이고, 믿는이에게 그 일이 너무 다루기 힘든 것으로 느껴지도록 할 것이다.그럴 때 그는 조용히 성령께 십자가의 능력을 적용하시도록 의지해야한다.

 


자아에 대하여 주님과 함께 죽음

 

우리의 체험에서 자아에 대해 죽는 것은 죄에 대해 죽는 것보다 더 깊고 진보된 것이다. 죄를 주의하는 것은 옳고 그들의 죄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옳다. 죄에 대한 승리는 모든 의의 기초요 합당한 그리스도인 생활의 열쇠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 신앙생활의 끝이 아니라 거듭남의 첫 단계라는 것이다. 성도가 죄를 이긴 후에 즉각적으로 당면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어떻게 자아를 이기는가이다.

종종 믿는이는 죄와 자아를 혼돈하다. 그들은 자아를 죄로 생각하고 자아를 죽음에 넘겨야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죄를 재던 잣대로 자아를 재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죄의 성품과 자아의 천연적인 생명이 잘 짜여진 존재다.

 


사람이 거듭난 이후 신앙생활의 시작단계에서 죄와 자아를 분별하기가 어려움을 발견한다. 그 후에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얻어 십자가의 역사와 성령의 능력이 그에게 더 분명하게 될 때 죄가 자아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할 것이다. 6:11에서 어떤 성도가 죄를 이겼을지라도 아직 자아를 이기지 못했을 수 있다. 생명안에서 진보한 자들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쉬운 반면에 자아에 대한 승리는 매우 어렵다. 만일 성도가 자아에 대한 온전한 승리를 체험했다면 사도들이 가졌던 생명을 얻은 것이다.

 


자아는 우리의 개성, 인격이며 우리의 의견, 기호, 사상, 등이 자라나는 것이다. 자아는 우리자신에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더한 것이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십자가의 처리를 받은 후에 죄의 몸은 마비될 것이고 더 이상 활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생명에 대하여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도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은사의 유익을 취한다할지라도 이는 그의 자아생명을 연장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러한 사람이 완전히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향하도록 역사하셔야한다. 성도가 자아의 악함을 깊이 인식하여 하나님께 이끌린 후 그는 기꺼이 자신을 죽음에 넘기기 원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자아가 죽는 길인가? 거기에 십자가외에는 길이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2:20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9:23


 

십자가외에는 자아를 죽음에 넘길 다른 길이 없다. 성도는 그들 자신의 힘으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다. 자아의 십자가에 못박힘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의 초첨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반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그분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못박으셨다. 못박혔다는 말은 우리에게 그것이 하나의 사실이지 희망이 아님을 보여준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이고 결코 이룰수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죽음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아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홀로 그분의 죽음 안에서 모든 옛사람을 십자가로 이끄셨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방법외에 다른 방법을 찾으려한다면 우리는 어리석을 자들이다.

 


오 주여! 내가 아니요 당신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죽음에 넘길 정도로 주님께 순복해야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아는 근절되지 않고 항상 존재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혀야한다고 말하는가? 자아가 죽었다는 것은 자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부터 자아가 하나님께 복종할 것이고, 자아의 좋아함이나 싫어함을 허락지 않고 자아의 모든 활동과 사상을 십자가에 못박고 끝내기 위해 십자가를 허락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아생명이 스스로를 조종하기를 그친다는 것은 자아생명으로부터 비롯된 삶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이상 자아생명이나 자아생활이 없고 자아의 껍질만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아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자신의 생각, 감정, 의지를 따라 행하지 않을 것이며 자아가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주의 영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에 순종하게 될 것이다. 자아가 죽지 않는 한 성령께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자아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은 후 우리는

 

1.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부인하는 것은 거절하고 무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아가 주인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매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아을 부인해야함은 매일 끊임없이 이루어져야한다. 자아는 항상 깨어있으므로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지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매일 순간수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져야한다.


3.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주님께 존귀를 돌리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12:25-

 


이 자아생명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한알의 밀알로 남아있다면 소용이 없다. 그것은 고통받는 장소인 땅속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죽을 때 밀알은 그의 아름다움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전과 같이 사람의 칭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죽고자 한다면 진실로 죽는다면 많은 사람의 칭찬을 잃어버릴 것이다. 전에 우리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아가 죽을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하여 사랑하시게 해야 할 것이고 성령으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적시도록 허락해야한다. 이제 자아가 죽음으로써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시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슬퍼할 때 슬퍼할 것이고 주님이 기뻐하실 때 기뻐할 것이다. 심지어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느낌이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신실하게 남아 있어야 하고 우리의 태도를 변치 말아야 할 것이다.전에 우리에게 유익하게 보이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것이다. 우리 자아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때 합법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난다. 이 단계는 진실로 취하기가 어렵다, 문은 똑바르고 길은 좁으며 그것을 찾는 이는 너무 적다.

 


어떠한 종류의 죽음인가?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주님은 몸소 이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꺼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기쁘게 죽고 그분의 십자가의 교통에 참여해야 한다. 매일 우리는 영원히 생명에 이르도록 열매를 맺고 많은 밀알들을 산출하기 위해 자아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자아생명을 미워하는 태도를 유지해야한다.. 이것은 하룻밤 새에 이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의 자아생명을 미워해야한다. 만일 우리가 끊임없이 이것을 실행한다면 우리의 욕망이 많은 자아는 그의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죽음은 궁극적이고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죽음은 생명의 문을 열어준다. 죽음은 열매를 맺기 위한 유일한 요구이며 필수적인 것이며 인간생활의 종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죽음을 진실로 체험했는가?

 


생명의 죽음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 결과는 많은 밀알들이다. 만일 우리가 비어있다면 우리로부터 하나님의 생수가 솟아나오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열매맺음은 완전히 우리의 죽음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믿는이들은 자아가 우리를 채우고 있었듯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채우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구원을 받지 않았다. 우리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열쇠와 구원받는 열쇠는 자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자아 안에 있으면 죄로 떨어지기 쉽다. 이것이 죄에 대해 죽고 자아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하는 이유이다. 자아에 대하여 죽는 길은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우리 자아생명을 죽음에 넣을 수 없다.


 

자아의 활동은 때때로 영적인 휘장안에 감취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가 자신을 아는 데 이르도록 모든 외적인 환경을 통하여 그 휘장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자아의 악함을 깨닫기 전에 하나님의 다루심을 통과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만일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가 자아에 대해 죽지 않는다면 영적생활에서 우리는 어떤 참된 진보를 이룩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과 내가 오늘 주님의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자아의 죽음을 적용하시게 하고 우리로부터 그것을 역사해 내시게 한다면 우리는 생활에서 큰 진보를 볼 것이다.

 

형제들이여, 한마음으로 선포하기를 원한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부디 자신의 영적체험을 이 말씀과 비교해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